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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Feb 25. 2023

(소설) 깊은 밤의 다음 날 2

아주 먼 기억 속에서 문득 찾아온 작은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녀의 음성과 그녀의 삶을 좇는 사이에, 어느덧 통화 시간이 시간 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녀를 향해 "엄마~"하고 부르는 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흐릿하게 들려왔다. 작은어머니와 둘이서 살고 있는 사촌동생 현주의 음색이었다. 그녀는 그제야 우리의 통화가 너무 길어진 것을 알아차린 듯이 서둘러 인사를 건네왔다.


"성지야, 내가 통화를 너무 길게 했지? 일요일인데..."


그녀의 기다란 한숨 속에 담긴 아직 못다 한 말들이 내 머릿속에서 엔딩크레디트처럼 올라갔다. 통화 시간이 꽤나 흘렀는데도 알아차리못할 만큼, 작은 어머니의 가슴속에도 맺혀있상처와 회한들이 많다는 것을 나도 비로소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비록 다른 세대를 살았지만, 같은 여인으로서 어머니로서 느껴지는 삶의 버거움 같은 것들이 작은 어머니에게서도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었다. 공연히 무안해하는 작은 어머니와 다음 통화를 약속하며, 우리는 각자의 방에서 그날의 헤어짐을 마쳤다. 


그녀가 남편을 떠나보내고 혼자된 것은 벌써 이십육 년이나 지난 일이다. 작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그녀 나이는 마흔일곱이었다고 했다. 지금 내 나이보다 한참을 어린 나이에 남편을 여의였던 것이다. 한 치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는 냉정했던 작은 아버지와 이십칠 년을 함께 살면서, 그녀가 남편에게 따뜻한 사랑을 받았던 것인지는 미처 듣지 못한 채 그날 통화는 끝이 났다.


내 어릴 적 기억 속에 작은 어머니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탤런트만큼이나 예쁜 여자의 모습이었다. 훤칠한 키에 복사꽃 같은 피부와 수려한 이목구비를 지녔던 작은 어머니가 입고 있던 옷들은, 나의 엄마뿐만 아니라 내 친구의 엄마들에게서조차 볼 수 없는 차림이었다. 내가 어린 시절 줄곧 상상했던 귀족 부인의 치렁치렁하고 불편한 의상들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녀는 어린 내가 보았던 여자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여성으로 기억되고 있을 만큼 화사한 여인이었다.


그렇게 고왔던 작은 어머니가 남편과 사별했을 때가 미처 오십도 되지 않은 나이였다는 걸 다시 확인하며 나는 새삼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십이 넘은 내 지인들 중에는 여전히 남자와의 달콤하고 관능적인 로맨스에 열광하고 있는 여성들도 제법 기 때문이다. 

 

그녀가 백 분 동안 쉬지 않고 내게 건넨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이나 공간의 이동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두더지 게임처럼, 머릿속 어딘가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의식의 흐름대로 그녀의 이야기는 천방지축 전개되었다. 그녀는 내가 뒤죽박죽 된 그녀의 이야기들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기억의 저장소에 차곡차곡 쌓아놓을 수 있 기술을 가진 사람이란 걸 알지 못했다. 


돌아가신 작은 아버지에게 언제부터 여자가 있었던 것인지, 작은 어머니를 만나기 전부터인지 아니면 결혼하고 나서 이후였던 건지 그것조차 물을 새가 없었다. 그 여자는 언제 정리가 된 것인지, 그도 아니면 작은 아버지 돌아가실 때까지 줄곧 관계가 지속됐던 것이지 그것 역시도 묻지 못했다. 작은 어머니가 그녀의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는 걸 알게 되고 나서 충격과 분노에 휩싸인 채로 찾아갔던 종교 집단에 큰돈을 헌납하고 난 사실이 들통나자, 작은 아버지는 작은 어머니에게 이혼을 요구해 왔다고 했다. 하지만 작은 어머니는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는 이야기까지만 그녀에게 전해 들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내가 어릴 적에 고모들과 엄마가 그런 비슷한 이야기를 나누는 걸 들은 적이 있던 것도 같았다. 그리고 그 돈은 작은 아버지의 권력과 인맥을 총동원하여 몇 년에 걸쳐 다 받아내었다는 소리도 들었던 것 같다. 떼인 돈은 다 받아내었지만 몇 년 후 작은 아버지는 유명을 달리하셨기에, 고모들이 남동생의 죽음이 작은 어머니 탓이라고 윽박질렀던 것이 지금에서야 이해가 되기도 하였다.


돈 때문에 싸우고 돈 때문에 죽는 일이 어디 한두 집이랴만은, 대체로 모든 죽음에는 타인의 잘못 보다는 그 자신에게 책임이 온전히 있기 마련이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의 숙명 때문에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 숙명 앞에서 내 마음의 길을 결정하는 건 어디까지나 내 자신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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