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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Feb 26. 2023

(소설) 깊은 밤의 다음 날 3

작은 어머니와 통화를 마치고, 나의 의식은 다시금 오빠 한성찬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집안의 꼭대기 자리를 차지하고 살았던 오빠에게 내가 일종의 경계와 질투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구태여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역심  따위를 품어본 적은 없었다. 게다가 그 자리를 빼앗고 싶을 만큼 우리 집안은 대단한 집안도 아니었다.


자연의 의미와 생의 신비에는 근접조차 불가능했던 집안의 어른들은 오빠를 한없이 전도유망한 황태자로 떠받들었다. 그런 집안에서 자라면서, 권위와 의무가 동일어라는 것을 어린 사내아이도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이 그러하듯이 그 사내아이는, 꼭대기 자리가 부여하는 지위의 높은 품격 속에는 약자에 대한 선량한 정의와 사랑이 밑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을 배우기도 전에 꼭대기의 권력 맛에 우선 길들여졌다.


온 세상을 이겨버리겠다는 듯이 언제나 승리에 찬 눈빛을 하고 살았던 어린 사내아이의 마음속엔, 아버지가 몇 차례 사기당한 돈 때문에 불화를 겪었던 시절에 어른으로서 현명하게 처신하지 못했던 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분노 그리고 적개심도 들어있었던 것 같다. 냉철한 두뇌를 가진 아이가 용납하며 같이 살기에, 나의 부모는 한참을 부족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자꾸만 엇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아들을 아버지는 서울에 계신 작은아버지 댁으로 보냈다. 그렇게 시작된 서울 생활은 고등학생 오빠에게 강남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인생에 대한 욕망을 확고하게 굳히도록 하였다.


나는 지금 강남 숭배자 오빠의 전화번호며칠째 수신 거절 중이다. 가족 관계에서도 식구들의 복종을 원하는 그에게, 그가 스스로 이룩했다고 여기는 모든 것들 속에 내재된 그의 오만과 추상적 폭력성에 저항하고 있음을 표시하려는 것이다. 상대의 복종을 원하는 모든 권력은 일종의 추상적 폭력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빠에게서 나오는 위세는 고상하고 순진한 허영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고 위선적인 교만이라고 말할 없겠지만, 비뚤어진 고집을 신앙으로 각색한 부모와 가여운 누이들을 돌보는 책임을 통해서 오빠는 자기의 너그러운 선행을 스스로 대견하게 생각하고 것은 아닐까 싶다. 세상에 효심과 선의를 공표하려는 듯한 요란스러운 행위와 조용한 돌봄 사이에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분간하는 것은, 실제적으로 우리 집 같이 특수한 상황에서는 그다지 중요하지가 않았다. 하지만 책임과 의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명분으로 모든 추상적 폭력이 허용될 수는 없다.


언제나 제일 꼭대기에 있는 사람은 그 공동체의 질서를 세우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서 엄격하고도 선의가 있는 사람들이 제일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게 바람직하다. 하지만 한성찬에겐 엄격함은 있으나 순수한 선의가 아쉬울 때가 많았다. 순수한 선의보다 철저하게 분석된 적용만이 공동체를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오산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것은 분리된 두 개의 방법이 아니라 합쳐진 하나가 되어야 마땅하다.


나는 내 늙은 부모가 남은 생의 시간들이나마,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음미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생의 시간을 음미할 수 있으려면 노동의 값어치와 그 노동으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소중함에 대한 감사를 아는 게 중요한데, 내 늙은 부모의 사정에는 스스로 음식을 섭취하며 생명을 보존하는 일만이 지금 당장 중요할 뿐이라는 걸 깨우치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그들은 늙어버린 육신으로 정신병 두 딸을 데리고 살겠다는 욕심을 진즉에 버렸어야만 했다.


이제 그들은 기나긴 인생의 말년에 와있다. 머지않아 인생의 항구에 도착할 것이다. 자식에 대한 사랑과 무지의 결합으로 빚어낸 그들의 험난한 인생길에서, 오빠와 나는 희생자였고 그들의 보호자이기도 하였다. 혈육의 정이 아니어도, 아직 끝나지 않은 오래 묵은 전투를  함께 치르고 있다는 것으로도 내 마음속엔 오빠를 향한 측은 전우애가 짙게 드리워져 있을지도 모른다. 한성찬이 어떠한 결심을 계기로 지나치게 계산된 이성과 건조한 감성을 발달시킨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을 포함한 가족들을 지키려는 의 얼굴 뒤에서 작은 아버지의 전자계산기 같은 미소가 허공으로 흩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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