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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Mar 10. 2023

(소설) 깊은 밤의 다음 날 4

우리 집안의 서글픈 역사는 기독교적 가치관에서 잉태된 "죄"에 대한 의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물론 그 "죄"라는 것은 구태여 기독교의 제복을 걸치지 않았어도 이미 우리 집안을 지배하고 있던 막중한 개념이었다. 그 개념은 다름 아닌 어머니의 의식 속에서 비롯된 것인데, 그것은 아버지를 향한 미움과 원망이 발아되어 피어난 한 송이의 검은 꽃이었다. 어머니는 지금까지도 언니들의 정신 질환이 모두 아버지의 죄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믿고 있다.


아버지의 죄라 함은 몇 차례 사기를 당해 큰돈을 날린 죄, 자식들 유년 시절에 거래처 사람 접대하다가 본인이 도리어 술에 만취해 여러 번(어머니의 기억 속에서 여러 번이라고 말씀하신 걸 보면 글쎄다.) 기생집에서 외박한 죄뿐이다.


작은아버지처럼 한 사람과 특별한 관계를 몇 년간 지속한 것도 아니고 접대하다가 통금 시간에 걸려 집에 오지 못했던 것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보니,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죄라는 것의 심각성이 크게 두드러져 보이진 않는다. 그래도 어머니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가 있는 것이 분명하고,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억울한 부분이 없지는 않을 것도 같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는 내가 어릴 적에 짐보따리를 하나 싸서 집을 나간 적도 있었다. 며칠 만에 돌아오셨던 건지 내 기억에 없는 것을 보면, 형제들 가운데 가장 어렸던 내가 어머니의 빈자리를 크게 느끼지 못했을 만큼 어머니의 가출 기간이 그리 오래 걸렸던 것 같지는 않다.


내 어린 기억에도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화를 냈던 가장 큰 부분은 '여자'가 아니고 '돈'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기생집에서 하룻밤 외박한 것도 속상했겠지만, 기생집에서 털린 아버지의 지갑에 더 열불을 냈었다. 그 당시 제법 지갑을 두둑하게 채워 넣고 다니셨던 아버지가 하룻밤 외박 후 집에 돌아올 때마다 빈 지갑으로 돌아오는 것을 한두 번 겪고 나서, 어머니는 바짝 독이 올라 있던 게 분명했다.


시집와서 두 칸짜리 문간 셋방에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시동생 뒷바라지를 하며 자식들 낳아 기르며 사느라 고생했던 어머니의 살림살이가 조금씩 나아질 무렵에 태어난 나는, 막내라는 이유로 어머니의 그 한스러운 시절의 고생담을 많이 듣지 못했다. 집안의 하나뿐인 아들 앞에선 감히 어머니도 아들의 아버지 흉을 보기는 어려웠기에, 어머니의 넋두리와 신세타령을 위로 두 딸들이 가장 많이 듣고 자랐다.


두 딸들은 어머니로부터 남자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자연스럽게 물려받으며 자랐겠지만, 중학생 큰언니의 서랍 속엔 알랑들롱을 비롯한 남자 배우의 사진들이 은밀하게 들어 있곤 했다. 연인들의 로맨스 소설을 좋아했던 큰언니 덕분에 나는 일찌감치 동화책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로맨스 소설에 심취하고 남자배우들에 열광했던 큰언니는 기독교가 기획해 놓은 죄와 벌, 천국과 지옥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 채 봉쇄 수녀원에 입소했다. 그 봉쇄 수녀원은 다른 수녀원과 다르게 학벌 위주로 수도자를 받아들이는 곳으로도 유명한 곳이었다. 명문대 출신 수녀들을 보려면 그 봉쇄수녀원으로 가는 게 맞을 테지만, 말 그대로 봉쇄된 곳이라 가족이라 하여 임의로 입장할 수도 면담할 수도 없는 곳이었다.


큰 언니가 봉쇄 수녀원에 입소하던 날, 딱 한번 그 수도회 건물에 발을 들여놓아본 적이 있다. 어두컴컴한 복도의 기다란 마룻바닥에서 들려오는 미세하게 삐걱거리는 소리에 집중하느라, 나는 큰언니의 입소가 크게 슬프지 않았다. 풀벌레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릴만큼 적막한 수녀원에서 까치발로 마룻바닥을 조심스럽게 걸어 다니는 수녀님들을 상상하며 나도 조심스럽게 까치발로 복도를 지나갔었다.


그 수녀원에서 큰언니가 퇴소한 것은 수녀원장의 강제 귀가 조치 때문이었다. 수녀원장은 큰언니에게 정신질환이 있어 보이니 집에 데리고 가서 병원 치료를 받아보라는 권고도 잊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날 큰언니가 수녀원을 나서며 "이게 다 아버지 죄 때문이다"라고 내뱉은 말을 철석같이 믿고, 드디어 남편을 향한 하늘의 심판이 내려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내심 속이 시원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두 딸들의 병은 아버지의 죄로부터 기인한 것으로 정의되고 선포되었다. 아버지 죄의 탓도 아니고 딸들이 벌 받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어머니는 지금도 알지 못하고 계신다. 어머니에게 두 딸들의 병은 아버지 죄 때문이어야 하고, 두 딸들은 조상들과 아버지가 지은 죗값으로 억울하게 고통받는 희생자여야만 했다. 그래야 어머니의 마음은 칠흑 같은 고통과 슬픔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전가 행위를 통해서 굳혀진 어머니의 맹목적인 신앙은 날이 갈수록 더욱 견고해져서, 올바른 의학적 치료에 접근하기보다는 사랑과 희생을 통해 구원받는 기독교적 해법에 의탁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버렸다.  


삼십 이년 세월 동안 아버지는 죄인으로 살아야만 하는 삶을 묵묵히 수행하셨다. 생각해 보니 자기 탓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닌 것 같았을 것이다. 마누라가 저렇게까지 자기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컸을 줄을, 그리하여 미욱한 두 딸들의 의식이 기독교적 '죄'의 함정에 빠져 영원히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될 줄을 아버지가 오십 대까지만 해도 꿈에도 몰랐을 테니 말이다.  


지난달에 큰언니를 병원에 입원시키던 날에도, 어머니는 봉쇄 수녀원을 나올 때 신발 끈을 묶으며 큰언니가 내뱉었던 "아버지의 죗값"의 근거 없는 믿음을 의사에게 큰소리로 전달하였다. 나는 너무 늙고 한이 많은 어머니를 달래며 담당 의사 앞에서 말했다. "그건 누구의 죄도 잘못도 아니다, 병에 걸리려고 하니까 병에 걸린 거다. 치료가 늦었다고 자책할 것도 없다. 저 병은 원래 죽어야 끝나는 병이다." 어머니는 귀가 잘 들려도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셨을 테지만, 이제는 귀가 어두워서 또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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