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라지 Feb 05. 2023

겨울 여행에서 만난 것들

흰 눈이 세상을 온통 하얗게 덮어버렸을 때 떠나자 했던 겨울 여행을 우리는 조금 늦게 떠났다. 특별히 목적하는 여행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서, 우리 부부는 형편에 따라 일정을 조율하는 편이다. 이번엔 전라남도 고흥으로 숙소를 예약하고 그쪽으로 움직였다.


크게 훼손되지 않은 천연 그대로의 자연환경을 보고 싶다면, 남동쪽이 아니라 남서쪽으로 방향을 잡는 게 옳을 것이다. 땅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간척지 사업으로 일군 땅 위에 하나둘 도로가 더 생기고 드물게 건물들이 들어서고는 있으나, 이십일세기에도 고흥은 여전히 미개발의 드넓은 자연을 가지고 있다. 사람이 살고 있는 섬들과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섬들을 수십 개 포함하고 있는 고흥군이 '지붕 없는 미술관'이라는 모토를 내세우는 건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졌다. 


브런치에서 나는 남편의 순수한 뇌구조에 관하여 종종 언급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남편에겐 브런치에 공개하지 않은 놀라운 능력이 몇 개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무언가를 찾아내는 능력이다.


예를 들면 4월에 열리는 국제정원박람회 준비로 순천만국가정원이 3월 말일까지 휴무라고 할 때, 남들 같으면 맛집이나 검색하고 풍경 좋은 카페나 들어가 있겠지만 우리는 언제나 그 주변을 찬찬히 탐색하는 편이다. 경치 좋은 곳에 메인 테마로 설립된 것이 있다면 바로 근처에도 아름다운 곳들이 숨어있을 확률은 매우 높다. 세상에 요란스럽게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기막히게 아름다운 것들은 세상 어디에나 존재한다.


순천만국가정원뿐만 아니라 순천만습지공원도 현재 휴장 상태이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습지생태관 옆으로 펼쳐 광활한 (대대뜰)에는 흑두루미 수천 마리가 떼를 지어 앉아 볍씨를 먹고 있었다. 출입금지 구역을 지키고 있던 경비초소 직원의 배려로, 우리는 조금 더 가까운 곳에 앉아 순천만에서 겨울 한 철에만 볼 수 있는 흑두루미 수천 마리를 오래도록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검은 학들의 휴식처를 떠나서 남편은 스카이큐브가 이동하는 물길을 따라 천천히 운전을 했다. 이제는 제법 낯선 도시에서도 지형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남편이 막다른 곳에서 순천만으로 연결되는 또 다른 하천을 찾아내었다.


그 천에는 넓적부리 저어새, 기러기, 왜가리 등 흔치 않은 새들이 평화롭게 겨울 한낮의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천적을 피해 먹이 활동을 하며 살아가야 하겠지만, 번잡한 구석이 없이 오직 먹고 쉬고 번식하는 것만이 전부인 들의 모습이 참으로 편안해 보였다. 나는 이제 순천을 떠올릴 때마다 온갖 새들의 낙원을 연상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순천에서 벌교보다 맛있는 꼬막 정식으로 늦은 점심을 먹고, 남편은 며칠 전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남원 호떡을 기어이 먹어야겠다며 남원으로 길을 잡았다. 방송 이후 전국에서 몰려든 손님들로 남원 호떡집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최소한 한 시간 이상 기다리면 될 것으로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해가 저물고 나서야 호떡 맛을 보게 되었으니, 우리가 기다린 시간은 장장 두 시간 이십 분이었다.


방향 감각이 꽤나 발달한 남편이 호떡집에 주문을 넣어놓고 또다시 마누라 손을 잡아 이끌었다. 우리가 호떡집에서 도보로 십여분 넘게 떨어진 하천가에 막 당도했을 때, 널찍한 돌들과 갈대숲 사이에서 한 여인의 이상한 행동이 포착되었다.


여인은 넓적하게 펼쳐진 명태포를 동서남북 방향으로 한 마리씩 힘껏 던지고는, 곧이어 막걸리 뚜껑을 열고 사방으로 술을 사정없이 뿌려대었다. 더 이상 던지거나 뿌릴 것이 없어진 여인은 마지막으로 사방을 향하여 퉤 퉤 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침을 뱉었다. 그리고 빈 막걸리 병들을 검은색 봉지에 다시 집어넣고는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


평범해 보이는 복장을 한 여인의 기이한 의식에 소요된 시간은 불과 삼사분도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여인은 그 단순하지만 수상한 동작들을 수십 번은 더 해본 사람처럼 몸짓이 매우 민첩했다. 말린 명태포를 던지는 시점부터 우리의 관찰이 시작되었으므로, 그전에 또 다른 의식의 절차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는 그녀가 물가에 있는 갈대밭을  빠져나와 산책로로 진입하는 모습까지만 바라보았다. 자신의 모습을 누군가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는 것을 구태여 그녀가 알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정월 대보름을 앞두고 벌어진 여인의 이상한 의식은, 대보름날 아침에 부럼을 깨서 뱉어버리는 주술적인 의식과 같은 성질의 것일 수도 있다. 무속인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였지만, 나는 그녀의 하는 일과 상관없이 그녀의 바람이 이루어지길 빌었다. 타인을 미워하거나 복수심에 가득 차서 누군가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목적을 가진 기도만 아니라면, 그녀의 기도가 그 무엇이든 이루어지길 그 순간에 진심으로 바랐던 것 같다. 악귀를 쫓아 버리고 싶은 마음이 클수록 사는 게 고단하다는 뜻이기도 할 테니 말이다.


여인이 있던 곳에서 이백 미터쯤 떨어진 인도 교각을 걸을 때였다. 저 아래 누런 갈대수풀을 응시하던 남편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좀 봐봐, 삵이야~" 나는 남편을 따라 걸음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 생명체 하나가 마른 갈대풀과 똑같은 색깔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먹잇감을 사냥하는 데 성공한 녀석이 식사를 마치고 의기양양하게 우리와 눈을 마주쳤다. 녀석의 이마에는 자신의 신분을 표시해 주는 흰 줄무늬가 두 줄 선명하게 박혀있었다.


평생에 한번 볼까 말까 한 진귀한 삵을 겨울햇살이 좋은 오후에 남원의 하천에서 만난 남편은, 나를 차에 태워놓고 삵을 보기 위해 다시 그 자리로 이차 탐사를 떠났다. 한참 있다가 돌아온 남편에 의하면, 녀석은 하천에서 물과 물 사이에 떠있는 작은 섬 같은 땅을 안전지대로 간주했는지, 거기를 몇 시간째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다고 했다.


남원의 어느 하천에 살고 있는 삵을 원 없이 구경한 남편이 호떡과 떡볶이를 잔뜩 싸들고 드디어 차에 탔다. 두 시간을 넘게 기다려 마침내 얻게 된 호떡이 맛있었던 건지, 보기 힘든 삵을 실컷 보고 와서 그런 건지, 남편은 피곤한 기색도 없이 캄캄해진 저녁 도로 위를 쉬지도 않고 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보름달을 올려다보며 이번 여행에서 만난 것들을 주욱 나열해 보았다. 흑두루미, 저어새, 기러기, 왜가리,  명태, 막걸리, 호떡, 삵.. 그리고 막다른 곳에서도 재밌는 거리를 찾아내는 능력을 가진 남편에 대한 고마움도 하나 거기에 덧붙여 있는 걸 발견했다.







 

  

작가의 이전글 적절한 슬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