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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Feb 01. 2023

적절한 슬픔

검은 바다 위를 맹렬하게 휘몰아치던 태풍이 지나가고 면, 수평선 위로 다시 붉은 태양이 떠오르고 고요라 불리는 침묵의 시간이 찾아온다.


오늘은 이천이십삼 년 2월 1일이다. 나의 친정에 세차게 불던 1월의 태풍이 사그라들고, 잠시 나는 고요한 바다 위에 홀로 떠있는 기분이다. 위태로운 태풍의 시간보다야 지금이 한결 살만한  사실이지만, 아직 내 영혼은 온기가 있는 뭍에 다다르지는 못했다. 어두운 밤을 태풍과 싸우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선원이 눈부신 아침을 침묵으로 맞이하듯이, 나의 2월은 여전히 망망대해의 고요한 아침으로 시작되었다.


한동안 나가지 못했동네 산책을 오랜만에 나섰다. 멀지 않은 수풀 에서 새소리가 들려왔다. 는 아름답게 들려오는 새소리에 이끌려 문득 고개를 들어 수풀을 바라보았다. 작고 예쁜 새 한 마리가 눈부신 햇살이 비치는 나무 위로 날아올랐다. 어느 결엔가 내 몸은 작은 새가 이끄는 대로 숲을 향해 고 있었다.


새소리가 들리는 작고 조용한 숲달큼한 봄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봄은 공기 중에서 느껴지는 바람의 온도보다, 발아래 맞닿는 흙의 감촉과 냄새에서 먼저 감지된다. 가끔 삶에 지쳐있을 때, 차창 밖으로 길게 펼쳐진 논밭에서 제 몸을 뒤집으며 일어서는 누런 흙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넉넉한 위안을 받곤 했었다. 


흙도 아름답고 새도 아름답고 모든 자연은 그 자체로서 적절하고 아름답다. 자연의 일부로서 태어난 우리도 아름다운 존재의 값어치를 수행하며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모든 사람들이 아름다운 존재로서 매 순간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자연 세계에서 그 존재 가치를 떨어뜨리며 살아가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본연의 아름다움을 스스로 탈각시키며 살아가는 것은, 자신에게 어울리는 '적절함'의 기준지키며 살못하는 까닭일 수도 있다. 나는 작은 숲을 산책하며, 내 슬픔의 적절함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내 현재의 슬픔 속에는 지나간 슬픔을 말없이 바라보는 슬픔 같은 침묵이 반복되고 있었다. 깊고 움푹한 구덩이에 살아남은 슬픔의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자꾸만 그 슬픔에 숨을 불어넣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두 언니들에 대한 깊은 연민은 그녀들의 죽음이거나 혹은 나의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끝이 나겠지만, 지혜로운 스승들의 설법처럼 나는 지금 나의 사태를 정직하게 대면하고 내 영혼을 돌봐야 할 때이다. 적절한 것이 언제나 타당한 것은 아닐지라도, 적절함을 지나치는 것은 대체로 위험하다. 자연의 모든 것이 적절한 것처럼 사랑도 슬픔도 연민도 적절해야 한다.


작은 새들이 나무 사이로 근심 없이 날아다니며 지저귄다.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상황들에 대하여 한없이 슬퍼하기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며 세상을 더욱 사랑하기로 다짐해 본다. 내게는 보살펴야 할 늙은 부모가 있고, 집에서 밥을 기다리는 다 큰 자식 놈들도 있지 않은가. 사람이 존재를 이어가는 길은 끝없이 적절하게 사랑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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