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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Jan 04. 2023

동문회 준비 일지 8(최종회)

디데이의 늙은 여전사

다 늙어서 선배들에게 반항하던 나 역시도 행사 하루 전날 1기 선배님과 회장 선배의 조언에 따라 식순을 조정하는가 하면, 대학 총동문회 회장의 방문을 주선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미 TFT 단톡방에서 퇴장한 후배와 함께 공동사회를 진행하라는 선배의 제안에는 결코 승복할 수 없었다.


드디어 동문회 행사의 막이 올랐다. 아침에 벌써 청심환을 하나 먹어두어서 그랬는지, 예정된 행사 시간보다 두 시간 앞서 컨벤션홀에 들어가는데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음향감독을 맡기로 한 선배님과 무대에서 재능 기부를 해줄 연주자들이 각자의 장비와 악기들을 가지고 속속 장하였다. 행사를 진행할 때 가끔 속을 썩는 부분이 음향 쪽임을 알고 있던 터라서, 장비 세팅과 점검을 한 뒤 간단한 리허설을 하기 위해 음향감독 선배와 연주자들에게 행사 전에 일찍 와달라고 요청을 했었다.  


커다란 공연장을 빌린 무대 행사가 아닌 까닭에 조명 쪽은 그다지 신경 쓸 일이 없었다. 술과 음식이 무르익어 갈 무렵 이 동네에 정전 사태만 발생하지 않으면 된다. 이십 대 때야 다른 학과 페스티벌에서 정전이라도 발생하면 모두들 오히려 기꺼운 마음으로 환호성을 질렀겠지만, 이제는 둔탁한 탁자 모서리에 신체의 일부가 부딪히기라도 할까 봐 조심하는 나이가 되었으니 정전 같은 사태에 마음 설레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평상시 입던 옷차림 그대로 행사장엘 들어갔다. 신고 왔던 앵클부츠가 굽이 있던 터라, 부츠를 벗고 오히려 굽이 낮은 단화로 바꾸어 신었다. 늙었어도 내 몸에 아직 남아있는 S라인이라도 보여주려면 굽이 있는 신발을 신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날 행사는 나를 할미꽃처럼 어여쁘게 드러내 보이려는 자리가 아니라, 그동안 동문회에 OOO라는 사람이 수고하고 있었음을 확실하게 보여주기 위한 자리였다. 나는 할미꽃의 정서가 아니라 여전사의 정서를 비장하게 가슴에 품고 사회자석에 섰다.


사회자의 옷차림과 외모야 어떻든지 간에 어차피 행사는 진행이 될 거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와 느낌대로 행사장에 왔다가 돌아가게 된다. 행사가 끝나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다는 것이 모든 행사와 축제가 갖고 있는 공통된 특성이다. 죽음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는 우리네 인생과 다를 바가 없다. 저마다 가장 멋진 옷을 입고 컨벤션 홀에 입장하지만, 아무도 당신의 멋진 모습을 기대하거나 신경 쓰지 않는다. 그저 각자의 멋진 모습과 기분만을 상상할 뿐이다.


며칠 전 대학 총동문회 사무국과 통화할 때도 나는 깐깐하게 이것저것 요청했었다. 결국 화환 대신 대학 동문회장이 격려금 봉투를 재킷 속주머니에 넣고 행사장엘 직접 찾아왔다. 대학 총동문회도 그들만의 애환과 노고가 있을 것이기에, 서로 돕는 차원에서 결국 총동문 회장의 방문을 내가 직접 나가서 맞이하였다.


홈커밍데이 행사를 알리는 오프닝 멘트를 날리는데, 나는 수십 번은 족히 마이크를 잡아본 사람처럼 매우 덤덤했다. 석 배치도에 따라 앉아있는 동문들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재빠른 말씨로 행사를 서둘러 진행했다. 출력해서 각 테이블마다 비치해 놓은 식순과 타임테이블에 가급적 어긋나지 않은 순조로운 진행이었다.


전체 행사의 디렉팅까지 하면서 단독 사회를 보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지만, 60석 홀 규모의 동문회 행사라서 가능할 수 있었던 것도 같다. 60석을 넘게 채우리라 예상했던 집행부의 판단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홈커밍데이 행사는 적절하게 마무리가 되었다.  


"나의 수고에 대해 예우가 적절치 못하다"는 나 혼자만의 생각에 사로잡힌 나머지, 가슴 저 밑바닥에 웅크리고 있던 서운함들을 끌어모았던 보름의 시간이 그렇게 끝나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십오 년 세월 동안 동문회를 향해 나 혼자 써 내려간 연애편지의 결말 같은 것이었는 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그 누구도 나에게 대놓고 서운한 말을 하거나 당혹감을 주려는 의도는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저 혼자 공연한 피해의식에 휩싸여, 도리어 쩨쩨한 방법을 써서 사회자로 내정되었던 후배를 자진 사퇴하도록 만든 장본인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그것이 과연 적절했는가에 대한 논의는 이제 와서 그다지 소용없는 일일 것도 같다. 나는 이제 가슴에 맺힌 정체불명의 서운함과 미련을 다 털어버렸기 때문이다.


누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내가 잘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시간 속에 다시 돌아가도 나는 그리 했을 게 분명하다. 조금 치사해 보여도 내가 수고한 노동에 대한 분명한 공치사를 나는 여전히 듣고 싶으니 말이다. 어떠한 조직을 위해 열정과 노력을 흠뻑 쏟아부은 사람들이 마음에 맺힌 게 없는 홀가분한 삶을 살기 위해서라도, 나는 공동체적 차원의 적절한 직위 부여와 공치사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인간 사회에서의 조화와 균형이란 어찌할 수 없이 인위적인 시스템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시스템의 공통점은 바로 '정치'에 기반한다는 점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정치적 동물로 태어난 나는 내 인생의  챕터를 동문회에서 써 내려갔다. 동문회에 희미하게 남아있던 한 조각의 서운한 마음조차 사라지고 어느새 그리운 마음만 커져가는 것을 보니, 아~ 참으로 아름다운 시절이었던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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