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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Apr 06. 2023

(소설) 깊은 밤의 다음 날 10

새마을운동이 시작된 1970년 가을에 작은어머니는 돌아가신 작은아버지와 결혼을 했다. 나는 그 해 삼일절에 태어났으므로, 작은어머니의 결혼식을 어머니 등에 업혀 보았는지는 아예  기억 속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날 내 어머니의 봉긋하게 솟은 머리를 상상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어머니는 육이오 피난길을 마치고 처녀 때 배운 미용 기술을 결혼 후 그녀 자신과 자식들의 머리에서 유용하게 발휘하였는데, 그중에도 으뜸은 어머니 머리를 고데기로 말아 올려 봉긋하게 세우는 기술이었다.


부엌 연탄불 위에서 벌겋게 익어가는 쇳덩이를 어머니는 아무렇지 않게 집어 들어 그녀의 머리 위로 가져가곤 했는데, 그때마다 집안에는 머리털이 타는 냄새가 나기도 했었다. 수탉이 벼슬을 빳빳하게 치켜세우고 목청을 돋워 울며 기세를 뽐내듯이, 타는 냄새가 진동한 에 부엌에서 나오던 어머니의 한껏 부풀린 머리 위에는 그녀의 모든 자존심이 얹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었다.


1970년에 태어난 내가 그 시대의 사회적 분위기를 운운하는 것은 대단히 시건방질 뿐만 아니라 출처가 불분명하여 대수롭지 않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 시절은 남자들이 성적 쾌락을 향유하기에 매우 적합한 시절이었다고 한다. 그때 나는 고작 아주 작고 약한 생명체에 불과했을 뿐이므로, 나의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가 경험했을 질펀한 요정 문화는 오직 나의 상상과 어머니의 식상한 한숨 속에만 있을 따름이지만 말이다.


다만 나에게 누군가 쾌락에도 어떠한 종류와 등급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철학을 공부했다는 이유로 나는 단호하게 "예스"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하다.


칠십 년대와 팔십 년대 우리 집은 일가친척들의 여인숙이며 단골 식당이기도 하였다. 신혼 초 단칸방에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시동생을 건사했던 실력으로, 어머니는 방이 네 개가 딸린(두 개의 방은 나중에 앞마당에 새로 지어 올린 채에 있었다) 집 한 칸을 장만한 이후로 집안 어른들의 잠자리와 식사 수발을 참 많이도 들었다.


계절과 상관없이 철 따라 사람들이 오고 갔다. 제사가 있는 날도 아닌데 비가 많은 장마철에는 비가 많다는 이유로, 눈이 많은 겨울에는 눈이 많다는 이유로 며칠씩 묵어가는 어른도 계셨다.


그러다 아예 몇 년씩 우리 집에서 살다가는 친척들도 생겨났다. 그들은 대부분 학생의 신분으로 학교 때문에 우리 집에 머물렀는데,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니 사촌언니 한 명만 빼고 다 남자였던 것 같다. 그런 와중에 갈 곳 없는 거지들도 가끔씩 우리 집을 찾아와 식사를 하고 갔다. 일가친척들로 시끌벅적한 우리 집 대문은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무렵에야 조금 한산해졌다.


언니들이 어떠한 이유로 남자들에 대한 병적인 거부감을 갖게 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집안에 남자 손님이 오면 다과상을 들고 안방으로 들어가는 건 언제나 막내인 나의 몫이었다. 그때만 해도 언니들의 남성기피증을 부모님은 딸들의 숫기가 없는 성격으로만 치부했었다.


담장과 이어진 대문의 꼭대기에 올라가 사내아이처럼 뛰어내리기를 좋아했을 정도로 괄괄했던 작은 언니에 비한다면, 바깥 놀이에 관심도 없고 또래들과 잘 어울리지도 했던 나 집안에서 가장 쇠약한 아이에 불과하였다. 집안에서 조용히 책이나 읽을 줄 밖에 모르던 내가 어머니가 말씀하시던 '숫기 없는 아이'라는 표현차라리 어울렸던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초등학생 때는 고무줄놀이는 물론 스케이트와 같은 다소 거친 바깥 활동에도 누구보다 극성스럽게 참여했던 큰언니였다. 큰언니의 고무줄 실력은 인근 동네에 명성이 자자해서, 동네 아이들은 편을 나눌 때마다 큰언니를 그들 으로 서로 끌어들이려고 온갖 아양을 떨었을 정도였다.


그랬던 큰언니가 중학생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방문까지 걸어 잠그고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들기 시작할 때, 집안의 그 누구도 큰언니의 이상 증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큰언니가 전교 1등의 자리를 놓친 적이 없다는 이유로, 어른들은 그저 공부에 전념하는 우등생의 예민함으로만 언니를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미 언니들은 삼십 년이 넘는 세월을 잃어버렸고 덩달아 가족들의 세월도 앗아갔지만, 나는 뒤늦게서야 큰언니의 아주 오래된 과거 속에 행여나 성추행 범인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 되었다. 의심스러운 것은 우리 집을 오고 갔던 일가친척들 뿐만이 아니다. 우리 집 뒤쪽의 담벼락과 바로 붙어있던 이웃집에는 큰언니보다 한살이 더 많은 남학생도 살고 있었다.


설령 그런 일이 있었다한들 지금에 와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딸들의 병이 아버지 죄의 탓이라고 윽박지르던 어머니는, 아버지의 한결같이 겸손한 모습에 화가 나서 급기야 조상들 죄의 탓으로 원인을 옮겨갔다. 조상들 죄에서 딸들이 병든 이유를 찾고자 하는 어머니와, 타인들을 향해 공연한 의심을 부풀리는 내가 크게 다를 바도 없을 것이다.


세상만사 내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말은, 모든 것은 나의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일일 뿐이라는 말과 동일하지 않은가. 언니들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이었든 간에 자기의식을 통제하지 못하고 망상의 세계로 피난을 간 셈이다.


병든 딸들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하느님의 역사가 있을 것이라아직도 믿고 있는 나의 어머니는, 또 다른 망상의 세계로 떠나간 도주자일 뿐이다. 나는 시시한 결혼 생활의 피로를 적절한 학문을 통해 회복하는 나만의 세계로 도주하였고 오빠는 그의 성공을 향하여 도주한 사이, 오직 아버지만이 슬픔과 고통의 정확한 자리에서 그에게 주어진 인생의 몫을 정직하게 감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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