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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Mar 28. 2023

(소설) 깊은 밤의 다음 날 9

작은 아버지는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셨는데도, 작은 어머니의 오래된 기억 속에서처럼 뒤돌아 나오는 작은 아버지와 마주칠까 봐 작은 어머니는 그 집을 세심하게 쳐다보지도 못한 채 황급히 몸을 돌아세웠다. 나는 그 집 가까이 다가서지도 못하고 뒤에서 서성이다가 작은 어머니의 황망한 팔에 이끌려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이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작은 어머니가 살았던 아까 낡은 집의 색이 바래고 검은 칠이 부서져 내린 대문과는 대조적으로, 그 여자가 살았던 집의 파란색 대문에서는 아직도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오래전 그 여자가 머물렀던 집의 파란색 대문과 마주 보이는 골목길의 끝에는 탐스러운 봉오리가 맺혀있는 목련꽃나무 한 그루가 싱그럽게 서있었다.


작은 어머니는 그 집 문 앞에서 돌아 나오며 이번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잔잔하고 부드럽게 흐르던 계곡물이 커다란 바윗돌 사이에서 부딪히며 포효하는 소리처럼, 그녀의 울부짖듯 토해내는 음성에서도 조금 거칠어진 쇳소리가 섞여 나올 뿐이었다. 나는 그녀의 흐르지 못한 시간 속에서 잠시 그녀와 함께 멈추었다. 흘러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추어버린 시간의 아픔을 나 역시 모르지 않았다.


한참을 토해내도 그녀의 한은 삭혀지지 않은 것  같았다. 어쩌면 그것은 언니들의 병처럼 각자의 죽음에 이르러서야 끝이 날 수도 있을 것이다. 가슴속에 너무 오래 고여 있는 고통과 슬픔들은, 이무기가 승천할 때를 기다리듯이 때로는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게 만들기도 한다. 고통과 슬픔으로부터의 영원한 해방은 내 육신이 존재하는 한 이 세상에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지야, 이제 곧 목련꽃이 피겠구나.. 작은 아버지가 서울 병원에 입원해 있었을 때 그 여자가 입고 왔던 옷도 아래위 하얀색이었어. 하얀색 바지에 흰색 블라우스를 입고 왔는데, '아, 이 여자구나.' 한눈에 알아보겠더라. 그때 여자 두 명이 함께 병문안을 왔었거든."


그 여자 집과 작은 집이 지척에 있다는 것을 작은 어머니가 알게 된 뒤 얼마 후 작은 집은 서울로 이사를 갔다. 작은 아버지의 직장 때문이었다. 그리고 작은 어머니는 생각했을 것이다. 이제 그 여자가 서울까지 좇아오진 않겠지라고. 하지만 모든 것을 알고도 단 한 번도 그 여자에 대해서 따져 물을 용기가 나지 않았던 작은 어머니의 생각은 어긋나고야 말았다. 두 명의 여자가 병문안을 왔을 때, 병원 침상에 누워있던 작은 아버지는 옆에 있던 아내에게 '그만 집에 가봐라.'라고 날카롭게 명령했다고 한다.  


그 여자의 집 앞 골목길에 쓸쓸하고도 아름답게 서있는 목련꽃의 하얀색 봉오리가 작은 어머니에게 주는 의미들은 남편을 향한 사랑과 증오의 경계 없는 슬픔처럼 보였다.


"내가 어릴 적에 본 작은 어머니는 탤런트들보다 더 이뻤는데, 왜 재혼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보신 거예요? 그때 작은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작은어머니 나이는 사십 대 중반이었잖아요.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아름다우신데, 저는 작은어머니 인생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렇게 속 썩이는 남편과 살았으니, 남은 인생 좋은 남자 만나 행복하게 살았어야죠."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다른 남자 만나볼 생각이 한 번도 안 들더라고. 이상하지? 내가 작은 아버지를 많이 좋아했었나 봐. 성지야, 아직 우리 애들은 아빠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 그런데 현지가 어느 날엔가 그런 소리를 하더라. 현지 대학교 입학하고 나서였던 것 같아. 동생들은 몰라도 자기는 아빠에 대해서 조금 아는 게 있다고. 언젠가 나 죽기 전에 애들한테 다 얘기하려고."


"애들 따로따로 불러서 말씀하진 마세요. 애들 놀라요. 차라리 한 자리에 불러놓고 확 열어 보이는 게 나을 거 같아요. 지들끼리 서로 부둥켜안고 울든 말든, 그게 충격이 덜할 거예요. 미국에서 현지 잠깐 들어오면 그때 해버리세요. 고통은 뭐가 됐든 함께 나누는 게 좋아요. 흐흐흐"


"너는 참 이상하다, 성지야~ 너 어릴 땐 몰랐지. 그런데 언젠가 네가 말하는 걸 들어보니까, 너는 이쪽 집안사람 같지가 않은 거야. 이쪽 집안이 워낙 피가 강하잖니~호호호. 그래서 이상하게 너 붙들고 내 아픈 얘기를 다 하게 된 거 같아. 고마워, 성지야"


작은 어머니는 그날 늦은 저녁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셨다. 그녀가 탄 고속버스가 떠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우리 동네에도 달빛 아래 하얀 목련꽃이 활짝 피어나고 있었다. 수줍게 감추는 것이야말로 처녀의 덕성(德性)이라고 믿고 있던 여인네가 노골적으로 자신의 여성미를 온 세상에 드러내는 것 같은 묘한 인상(印象) 목련꽃잎에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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