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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Mar 27. 2023

(소설) 깊은 밤의 다음 날 8

그로부터 며칠 뒤,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온 작은 어머니를 터미널에서 만났다. 그녀의 아들 결혼식에서 보고 팔 년 만에 해후였으나, 우리는 며칠 전에 만났던 사람들처럼 반갑게 서로를 알아보았다.


나의 친정 쪽엔 집안의 유일한 아들 노릇을 자처했던 오빠 외에도 한 명의 아들이 더 있는데, 그는 돌아가신 작은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나의 사촌 동생이었다. 어릴 적에 집안의 난간에서 떨어졌던 충격 때문인지, 사촌 남동생의 성품은 그의 아버지와는 매우 다르게 유약한 면이 있었다. 작은 아버지의 뛰어난 셈 머리를 닮은 쪽은 작은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그의 둘째 형의 아들인 나의 오빠였기에, 아마도 작은 아버지는 오빠를 각별히 신뢰했던 것도 같다.


내가 언니들을 통해 인생을 배웠다면, 작은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나버린 남편을 통해 인생을 배운 케이스였을지도 모른다. 작은 어머니는 그녀가 젊었던 시절에 나의 어머니에게 받았던 정이 몹시도 고마웠노라고 회상하였다. 그녀의 회상은 늘  어머니의 안부와 염려로 시작되었으나, 몇 분 지나지 않아 여지없이 죽은 그녀의 남편에 대한 한 서린 회고로 넘어가 있곤 했다.  


우리부모님이 살고 있는 집에 우선 들렀다. 귀가 어두운 어머니와 여전히 세련된 옷차림의 작은 어머니는 다음을 기약하기엔 버거운 약속을 서로 나누며 주름진 얼굴에 옅은 미소들을 지어 보였다.


엊그제 작은 어머니와 통화를 하며 오늘 내 하루의 시간이 온전히 그녀에게 할애될 것을 나는 예감하고 있었던 것 같다. 작은 어머니는 그녀가 유년 시절을 보냈던 동네와 그녀의 신혼집이 있었던 동네로 차례차례 나를 안내하였다. 그녀의 기억 속의 이 도시와 나의 기억 속에 있는 이 도시의 옛 모습은 서로 일치하지 않았지만, 나는 최대한의 정보들을 이끌어내어 그녀가 원하는 추억 속으로 운전하였다.


이 도시의 사람이면 누구라도 아는 구 도심의 번화가에서 부잣집 딸로 태어났던 그녀의 집안이 가세가 기울어진 것은, 큰 사업체를 경영하던 그녀의 아버지가 사기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여고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던 그녀를 우연히 보게 된 작은 아버지는 그녀를 미행하여 집을 알아내고, 끝내는 그녀의 형부에게 선을 대어 그녀의 집을 드나들게 되었다.


구릿빛의 피부 속에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가진  청년을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고작 스무 살이었다. 그녀가 결혼을 하고 아이 셋을 낳아 길렀던 집은 아직 철거되지 못하고 그 옛날 모습 그대로 그 동네에 머물러 있었다.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만 같은 그 집 문 앞에 다다르자, 이제는 늙어서 주름이 진 목을 연신 기다랗게 빼고 그녀는 담장 너머로 닫혀있는 그 집을 구석구석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오래되어 낡은 담장과 녹슨 대문은 어느 게 먼저랄 것도 없이 바로 주저앉을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는데, 옛 시간을 마주한 그녀의 눈에는 촉촉하게 눈물이 맺혀 있었.


그녀는 흔들리며 갈피 없는 눈동자로 내 손을 잡고 어딘가를 향해 다시 걸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 골목으로 들어서며, 그녀가 먹먹해진 목소리로 나를 향해 외쳤다.

 

"이 집이 틀림없어. 그날 느낌이 이상해서 내가 작은아버지 뒤를 밟았더니, 바로 이 집으로 들어가더라고. 안에서 나이 든 여자가 그 여자 이름을 말하면서 잠깐 외출했다고 하니까 작은 아버지가 다시 뒤돌아 나오는데, 내 몸이 움직여지지가 않는 거야. 너무 놀라서 그 자리에 얼어붙어있던 나를 보고 작은 아버지가 화를 내더라."


작은 아버지가 따로 만나고 있던 여자는 사실 이 도시 사람이 아니었다. 그 여자와 그 여자의 어머니가 살 집을 구해준 것도 작은 아버지였을 것이라고 작은 어머니는 말했다. 그 여자의 집과 작은 집은 걸어서 3~4분 거리에 있었다. 작은 어머니는 단 한 번도 "그 년"이라는 망측한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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