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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Apr 24. 2023

(소설) 깊은 밤의 다음 날 13

모든 인간은 자기 방식대로 그만의 아포칼립스를 향해 달려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의 씨앗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의 아포칼립스적 운명으로부터 '비통한 '을 구원하기 위해 기독교가 '천국''부활'의 이야기를 지어냈다면, 불교는 '자기 해탈'을 제시할 따름이었다. 


내가 언제부터 죽음에 대한 단상에 젖어들었는지는 기억할 수 없지만, 사람들이 자신 죽음뿐 아니라 타인의 죽음까지도 순순하고도 기꺼이 감당할 수 있었더라 아마도 이 세상에 비과학적이며 야만적인 종교들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은 비단 삼십 대에 처음 들어선 것이 아니었. 지구상에 오직 인간이란 동물만이 이야기를 지어내고 종교를 만들어내었기에, 과연 내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한 마리 새로 태어난 것보다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나는 자라면서 종종 던지했었.


인간 존재에 대한 답을 구하지 못한 나는 어설프게 성년이 되어야만 했다. 아직 깨어나지 않은 새벽 도심이 희뿌연 안개에 온통 둘러싸여 있는 것처럼, 성년이 된 나의 영혼은 해결되 못한 질문들의 성벽갇혀서 갑갑하고 불분명한 날들을 이어갔다. 하지만 뿌옇게 내려앉은 안갯속에서도 선명하게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은 있는 법이었다.


모든 것이 애매모호하기만 했던 내 청춘 시절에도 분명하게 지향했던 하나의 목표있었는데, 그것은 숭고하고 진실된 남녀 간의 사랑이었다. 천주교가 수도자들에게 가르친 정결과 청빈이라는 고결한 덕을 흉내 내보고 싶었던 나는, 고귀한 사랑이라는 환상의 틀 속에 성숙해진 육체의 욕망을 가두어두려 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하나의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고결한 사랑을 주고 싶은 상대를 찾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이기심에서 비롯된 야만성을 사랑이라고 착각했던  남자의 집착까지 받아야만 하는 난처한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언니들의 정신질환이 집안을 점점 더 시커멓집어삼켜버리는 것을 보게 되면서, 나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갖지 못한 채로 도망치듯  남자의 아내가 되어 집을 떠났다.


잘못된 선택은 언제나 위태롭기 마련이다. 나는 무수한 고통들이 휘몰아치는 거친 바다에서 삼십 년을 표류하였다. 검은 바다 저 밑으로 삼켜지지 못하정처 없이 떠밀려 다니던 어느 날, 바다도 지쳤는지 나를 어내어 하나의 섬에 다다르게 하였. 거기에는 나의 의지가 개입된 것이 아니었다. 하느님이 먼저 그의 백성을 선택하였듯이, 예수가 먼저 그의 제자들을 선택하였듯이, 고통의 바다는 나를 뭍으로 뱉어내기로 선택하였다.

 

나에 앞서 누군가 다녀갔을 법한  섬은, 삶과 죽음에는 어떠한 특별한 의미가 없다는 것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그 섬에서 나는 영혼의 피로를 씻어내었고, 고통에서 해방되어 존재의 기쁨을 누리는 법을 배웠다. 오십 년 만에 비로소 나는 하나의 "무의미하고도 온전한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일부러 그 섬에 도달한 것이 아니었듯이, 내 속에 도사리고 있던 온갖 두려움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었던 것 역시 내가 작정하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인생무의미함을 깨닫게 되자 내 마음에 자유로움이 찾아들었고, 이내 말할 수 없는 평화로움에 이르게 되었다. 그 모든 일들이 순차적으로 일어나자, 나는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오랜 시간 동안 기독교의 교리에 지배당했던 나는 끝내 천주교 노선을 이탈하여 은밀한 탈주자가 되었으나 전복을 꿈꾸는 자는 되지 못하였다. 기독교의 교리에서처럼 구원은 믿음으로 일어나는 것만은 분명한 듯하였다. 하지만 그 믿음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보혈로 얻게 되는 믿음이 아니라, 존재의 소멸성에 대한 겸허한 순종의 믿음이었다.


존재의 결말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매 순간 시비하는 마음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과자봉지 주둥이를 가위로 자를 것이냐 손으로 찢을 것이냐를 두고 나는 여전히 남편과 시비하는 것을 멈추지 못했고, 언니들을 퇴원시켜 집으로 데려오라는 어머니의 투정을 말없이 외면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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