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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Apr 27. 2023

(소설) 깊은 밤의 다음 날 14

머리가 굵어지기 시작할 즈음, 나는 가끔 성경책을 들척거릴 때마다 어이가 없어지곤 했었다. 야훼(여호와) 하느님께 선택된 민족, 선택된 백성이라니, 그건 그 민족의 역사책에나 등장할 법한 이야기가 아닌가. 신이 계시다면 어떻게 특정한 민족만을 선택하여 그의 자녀라고 말씀하시겠는가.


신약은 또 어떠한가. 구약과 신약의 앞뒤 이야기를 두들겨 맞추려는 듯이, 예수라는 주인공 속에 그 민족의 거창한 꿈을 투영해 놓은 듯한 기독교의 경전은 왠지 어설프고 황당해 보이기까지 하였다.


나는 비록 어린아이였지만 '선택'이라는 단어를 몹시 흠모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독교에서 흔히 등장하는 '선택된 백성'이라는 표현에는 동의는커녕 알 수 없는 분노심마저 일곤 했었다.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은 어쩌면 기독교의 정신에서 비롯된 건 아닐까 의문이 들기도 할 때였다.


구약에선 다른 민족을 거침없이 응징하던 야훼가 어느 날 변하였다. 그의 아들을 친히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내보내어, 그의 아들을 믿는 자는 누구든 구원을 얻으리라는 최후의 메시지를 인류에게 던지고야 말았다. 최후의 메시지는 그야말로 극강의 미끼였다.


영겁의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진흙으로 인간을 빚어야만 했던 야훼는, 자기가 빚은 인간의 후손들이 이기심과 탐욕에 눈이 멀어 온갖 죄를 저지르며 그가 아끼는 지구별을 파괴해 가는 모습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인류를 죄악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혹은 그가 보살피는 정원인 지구의 멸망을 막기 위해 예수를 보냈으나, 예수가 사실 하느님을 닮은 적자는 아닌 걸로 여겨지는 대목이 바로 여기다.


처음부터 지구라는 이 땅에 온갖 생명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부터가, 야훼가 스스로 즐거우려는 이기심과 욕심을 반증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므로 이기심과 탐욕에 눈이 먼 우리들이 야훼 하느님의 친자들일 확률이 더 높을 것이며, 예수는 오히려 하느님의 아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기도 했었다.


천주교의 교리와 기독교 고등학교의 교육 속에서 성장하면서도, 선택된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기독교인들의 무례한 뻔뻔함과 오만함 앞에서 나는 망연자실할 때가 오히려 더 많았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나는 천주교인이었으며, 우리 집은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으로 비치기도 하였다.


타인들이 보기엔 이상적인 집안일 수 있었지만, 우리 집은 한 명의 어린 사내아이의 권세가 비정상적으로 드높아져 있는 동안, 장녀는 이미 마음과 정신의 어딘가에 병증이 움트고 있어서 결코 건강한 집안은 아니었다. 한낱 꼬맹이에 불과했던 한성찬을 온 집안사람들이 왕자님 떠받들듯이 모시는 바람에, 사내아이는 배워야 할 것의 순서가 뒤바뀐 채로 어른이 되어갔다. 어머니는 자기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남의 집 귀한 자제 모시는 것처럼 아들을 조금씩 불편하게 여기기도 했지만, 어머니의 욕심과 오만을 가장 많이 닮은 자식은 다름 아니라 그녀의 아들이었다.


이제 육십을 바라보는 그 사내아이는 어릴 적부터 자기가 누렸던 그 모든 권세에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뒤늦게 배우게 되었다. 욕심 없고 계산 속이 어두웠던 아버지의 땅들은 십수 년 전에 모두 아들의 차지가 되었었다. 어머니와 다른 자식들 아무도 모르게 진행되었던 그 증여가, 지금에 와서 아들의 발목에 족쇄가 될 줄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었다.


아버지는 점점 더 말수가 적어지셨다. 어머니는 밤늦게 찾아온 카드 배송원을 노인들을 위협하는 사기꾼이라고 오해하여 돌려보내고, 기어이 다음 날 나를 지팡이 삼아 의지하며 농협으로 향할 만큼 욕심이 살아있었다. 부모님 집 바로 옆에 붙어있는 농협 하나로마트에서 판매되는 상품들 가운데 농협카드 할인이 적용되는 게 더러 있기 때문이었다. 사정 이야기를 전해 들은 농협에선 어머니의 카드를 지점에서 받아놓은 뒤에 내게 연락을 주기로 하였다.


늦은 의 꽃들이 벌써 지고 있었다. 해마다 조금씩 꽃들이 개화하는 시기가 빨라지는 만큼 낙화 시기도 예전보다 앞당겨지고 있으나, 결국 꽃들의 수명에는 큰 차이가 없는 셈이었다. 꽃들은 부활이나 천국을 꿈꾸지 않기에 한 점의 미련 없이 스스로 낙화한다. 때에 이르러 기꺼이 스스로를 소멸시킬 수 있는 것은 모든 존재의 평등성이었다. 나는 점점 더 계산적이위선적인 인간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 같았다. 부모님의 남은 날들과 나의 수고를 문득 하나의 저울에 올려놓을 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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