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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May 11. 2023

(소설) 깊은 밤의 다음 날 15

태초에 첫 계약은 야훼 하느님과 첫 사람이었던 아담 사이에 있었을 것이다. 다음에 야훼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었으며, 얼마 후 모세와는 석판에 글자까지 새기며 계약을 체결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야훼는 그의 하나뿐인 아들과 모종의 거래를 주고받았는데, 그 비밀스럽고도 공공연한 계약 덕분에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인류는 죄로부터 영원한 구원의 희망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야훼의 숨결에 의해 세상이 생겨날 때부터 계약은 언제나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만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이유로 이 세상의 모든 계약은 처음부터 남자들만의 것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우리 집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나의 아버지와 그에게서 나온 아들의 계약은 부모님의 죽음과 두 언니들의 죽음에까지 유효해야 할 것이겠지만, 나와 아버지는 아무런 계약을 맺은 바도 없이 새로운 유대를 형성하게 되었.


노쇠하여 병약해진 아버지와 막내딸 사이에 새로운 유대라 함은 부녀지간이라는 이유에서 파생된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지만, 아버지가 그의 인생에서 그다지 고려해 본 적이 없던 막내딸에게 병든 육신을 의탁하게 되면서 시작된 새로운 유대는 내게 썩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다.         


카네이션꽃들이 꽃가게 맨 앞으로 곱살하게 나와 앉은 날, 아버지는 자신의 병명과 상태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수술실로 들어갔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머물렀던 도심그들의 구체적인 업적을 따라 지어진 병원에서 아버지는 여섯 시간을 넘게 혼자 수술실에서 견디었다. 그의 아들이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병원 건물의 한편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는 동안, 그의 막내딸은 병실에서 아버지를 기다렸다. 며칠처럼 느껴지는 길고 애달픈 시간이었다.


병실 창밖으로 캠퍼스의 오래된 석조 건물들 앞에 나란히 마주하여 늘어선 현대식 건물들이 바라다보였다. 새로운 것들 사이에서 오래된 것들이 뿜어내는 아우라는 언제나 초연하고 품위가 있었다. 그들은 낡은 것이 아니라 가늠할 수 없이 깊은 고요와 우아함을 간직하있는 것이다. 수술을 마치고 병실로 돌아온 아버지의 수척하고 오래된 몸에묘한 어여쁨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틀니를 빼서 합죽이가 되어버린 입매 위에 콧줄을 끼고 병원 침상에 누운 아버지는 고단하고 긴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날 밤 나는 잠들지 못하고 아버지의 콧줄 밑으로 자꾸만  손을 옮겨가 보았다. 똑같은 밤들 속에 다른 날이 새침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잠들기 전 수술 통증을 호소했던 아버지가 먼저 일어나 침상에 누워 새벽을 맞이하였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지나갔다고, 아버지는 수술실의 기억옛날 이야기하듯이 떠올리며 힘없는 목소리로 막내딸에게 생존 신고를 건네왔다.

                

힘겨운 수술을 마치고 살아 돌아온 아버지를 병실에 혼자 남겨두고, 나는 병원과 붙어있는 대학 교정으로 잠시 산책을 나갔다. 아버지를 따라 신촌에 오게 되면서 나는 매일같이  교정을 바라보았다. 대상을 바라만 보기만 할 때 오히려 헛된 갈망이 깊어지는 법이다. 며칠 동안 깊어진 나의 갈망은 아침 산책의 신성한 의식에 참여하는 것으로서 비로소 해소되는 것 같았다.


오래된 석조 건물들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들과 옛사람들의 정취를 담고 있는 건물들 사이에는 어떠한 계약도 없었을 것이지만, 그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길고 긴 시간을 함께 보냈을 것이다. 아침 여섯 시의 교정을 비추눈부신 햇살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나의 영혼은 드높아지고 충만해지고 있었다.  


백 년 전 이 땅에 머물렀던 외국인 선교사들이 지어 올린 석조건물 앞으로 검은 모자 아래 금발을 늘어뜨린 거구의 여자가 걷는 듯이 뛰어갔다. 그녀의 느리고 무거운 발걸음 뒤로 찬란한 햇살이 따라붙었다. 이곳에선 모두가 오래되고 동시에 모두가 새로운 시작인 것 같았다. 나는 느슨하고 편안한 아침의 햇살 속에서 커다란 몸집을  외국 여자의 속도와는 반대로 뛰는 듯이 빠르게 걸어서 병원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가 누워있는 병실로 어제 수술을 집도했던 교수가 찾아올 것이다. 아버지가 진료를 보기 위해 처음 그를 만났던 날과 수술 후 병실로 회진을 왔던 늦은 저녁에도 그에게선 싱그러운 냄새가 났었다. 그의 하얀색 가운 아래로 나와있던 와이셔츠의 우아한 소매깃은 신중하고도 섬세한 그의 손길을 말해주는 듯했다. 나는 그가 오기 전에 내 몸에서 나는 묵은 냄새를 씻어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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