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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May 12. 2023

(소설) 깊은 밤의 다음 날 16

큰 수술을 받은 아버지는 살아온 세월의 날수에 비해 회복이 빨랐다. 수술 후 이틀 만에 안색도 편안해졌고 내딛는 발걸음에도 힘이 실렸다. 병동에 근무하는 근로자들도 아버지의 나이를 확인하는 순간부터 모두 아버지를 존경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성자의 모습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워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때마다 나의 어깨는 한층 더 늠름해졌다. 키에 비해 다소 작은 내 어깨는 "자, 다들 보십시오, 이런 분이 내 아버지십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가끔 나와 아버지의 관계를 묻곤 했는데, 누군가는 효심이 뛰어난 손녀딸인 줄로 알았다고도 했다. 일간의 병원 생활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나는 크지 않은 어깨를 가지고 있었지만, 2인실 룸메이트 환자 아저씨의 능글스러운 눈빛 정도는 호탕한 웃음으로 제압할 수 있을 만큼의 패기 있는 아줌마였다. 키가 작고 약간씩 고개를 떠는 그의 연약한 아내에게 나는 웬일인지 보호자의 마음이 들 때가 있기도 했다.


아버지의 아들은 마스크를 단단히 채운 상태로 매일 병실을 다녀갔다. 늙은 어머니는 집에서 평생 처음으로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삼십 년 세월 동안 망상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두 딸들을 돌보느라 분주했던 어머니의 고집스러운 성품이 일주일 만에 수그러들리 만무하겠지만, 나는 어머니의 삶 속에 한 번은 고독한 시간이 찾아들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 같다.


풍부교육에 의해서 고양된 지성을 가진 사람만 고독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 고독은 인생의 무의미한 의미를 깨닫게 해주기도 하지 않던가. 외로움은 사람을 자살 충동으로 이끌기도 하지만, 고독은 사람을 타인과의 성숙한 교류로 나아가게 만드는 근성을 가지고 다.


어머니는 이 집안의 조상들이 대를 거듭하면서 쌓아 올린 값을 대신 치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녀의 두 딸들을 거룩한 희생자로 예우하고 있었다. 그런 맥락에서 희생자인 딸들을 기도로서 보호하고 음식으로써 거두어 먹인 어머니는 이 집안의 수호자인 셈이었다.


아주 옛날에 성령이 비둘기의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듯이, 어머니에게 두 딸들은 망상을 통해 주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이며 거룩한 사제의 모습으로 여겨지기도 다. 자식들을 향한 어머니의 절제 없는 사랑은 어머니 자신조차 속도록 만들었지만, 어머니에게 그러한 어리석은 믿음마저 없었더라면 하염없이 길고도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차마 견디지 못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기독교인들은 흔히 스스로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엄청난 일에 부딪힐 때마다, 주님의 뜻은 인간의 지혜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한다. 알 수 없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자신의 딸들이 고통을 대신 받고 있다는 어리석음에 사로잡혀 있는 어머니의 한결같은 믿음은,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붕괴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우리 집안에 구원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어머니와 언니들의 죽음뿐일 거라는 확신에 도달한 적도 있었다.


만약 물리적 죽음에 이르지 않고 구원을 얻으려면 내 생각과 고집을 죽여야 하는데, 어머니도 어머니의 두 딸들도 자신의 망령된 생각을 죽이는 방법을 도저히 알 수가 없을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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