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라지 May 20. 2023

(소설) 깊은 밤의 다음 날 17(최종회)

가끔 그의 부인이 병실을 비운 사이에 매우 적절한 예의를 갖추어 내게 말을 붙였던 아버지 병실의 룸메이트 환자보다 아버지는 하루 더 빨리 퇴원을 하였다. 물론 예정대로라면 그는 아버지보다 하루 더 늦게 퇴원할 수 있었겠지만, 나는 신촌을 떠나면서 그들의 연락처를 받아두지 않았으므로 그의 퇴원에 관해선 정확하게 아는 바가 없었다.


키가 작고 가끔씩 고개를 떠는 그의 아내는 항상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있었는데, 처음에 나는 그것이 그녀가 추구하는 패션의 컨셉인 줄로만 생각했었다. 그러다 문득 가볍게 흔들리는 그녀의 머리를 우연히 보고 나서, 그녀의 두건은 그녀가 구태여 입 밖으로 말하지 않는 병증과 관련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나는 아버지의 병실에서 매우 지쳐있었다. 하지만 신체를 짓누르는 피로함의 무게가 오히려 내게 평화로움을 건네주곤 했는데, 그것은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자가 느끼는 일종의 허탈한 감사의 마음과도 유사하였다. 바로 앞에서 죽어간 전우들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울고 난 뒤 다시 폭격을 피해 재빠르게 참호로 몸을 숨기는 군인의 심정과도 같았다.


언니들은 내게 죽은 전우들만도 못한 사람들이었지만, 나는 그녀들을 영예롭게 가슴에 묻는 법을 조금 깨우쳤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살려야 할 또 한 명의 전우가 바로 내 앞에 있었으니 말이다.


아버지의 아들은 그의 아버지가 퇴원 후 집으로 돌아가서 노환으로 하루의 대부분을 누워있는 어머니와 단 둘이 생활하는 것을 걱정한 나머지, 의사의 퇴원 권유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며칠을 더 병원에 있기를 희망하였다. 집을 떠나 병원 생활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피로한 시간들인지 오빠는 알지 못하는 듯하였다.


아버지를 곁에서 돌본 나의 판단은 의사의 판단과 일치하였다. 아버지는 의료진의 지시에 따라 적절한 섭취량과 운동량을 엄격하게 지킬 수 있을 만큼 수행력과 분별력을 지닌 분이셨으나,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퇴원 후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을 지극히 우려하였던 것이다. 결국 아버지의 아들은 하루라도 속히 퇴원하고 싶다는 그의 아버지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마치 힘겨운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 것처럼, 나는 집에 돌아와 깊은 잠에 들었다. 아버지의 병실에서 바깥 풍경을 바라볼 때마다 문득문득 떠올랐던 언니들도 그날 밤엔 꿈속으로도 찾아오지 않았다. 빗발치던 폭격이 잠시 멈춘 전쟁터에서 아직 살아있는 존재들에게 찾아오는 짧은 안식과도 같은 잠이었다.


잠들 수 없는 밤들마다 나는 지옥불의 고통을 떠올리곤 했었다. 신체에 가해지는 형벌의 고통이 얼마일지 모르겠지만,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공포와 두려움이 물리적 고통 못지않을 때도 있다. 그 한계 앞에서 누군가는 스스로의 목숨을 끊기도 한다.


자신들의 아버지가 큰 수술을 받은 것도 알지 못하는 언니들은 정신병원 안에서도 여전히 소란과 문제을 일으키고 있었다. 소란을 일으킬수록 자신에게 투여되는 약이 더 많아진다는 것을 헤아릴 수 있을 만큼만 되어도 좋으련만, 그녀들의 생존 본능은 그러한 인식에 도달하지 못할 정도로 참혹한 지경이었다. 자신 외에는 아무도 나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을 그녀들은 알면서도 알지 못하였다.


정신병원 침상에서 떨어져서 큰언니는 입원 후 몇 달 만에 정신병원 바깥으로 나갈 수 있었다. 정신병원과 협력병원으로 지정된 외과병원을 다녀가면서 오빠는 내게 말했다. "너무 불쌍해~"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오빠의 음성에 눈물이 가득 고여있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오빠의 그 한마디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내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사이에 나 모르게 어떠한 계약이 오고 갔었는지 그런 게 더 이상 하나도 거슬리지가 않았다. 목이 메인 나도 오빠에게 간신히 한 마디를 건넬 뿐이었다. "고생했어, 오빠~"


며칠 후 나는 매일 드나들던 부모님 댁을 벗어나 한 사람과 속리산엘 갔다. 늙수그레한 부부가 우리를 낚아서 그들의 가게로 데려갔다. 나는 그저 그런 비빔밥 한 그릇과 나물전에 동동주를 마셨다. 봄인지 여름인지 알 수 없는 계절의 시간이 법주사의 승려처럼 지나가고 있었다.(끝)

작가의 이전글 (소설) 깊은 밤의 다음 날 16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