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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May 24. 2023

어느 봄날의 산책

길가에 피어난 하얀 꽃들 사이로 나비가 한 마리 날아다녔다. 노랑나비였다. "어~, 노랑나비다." 여자가 진귀한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이 나지막한 소리로 외쳤다. 흰나비는 자주 보았지만, 노랑나비는 흔하게 보이지 않는다. 저편에 오층 건물로 지어 올린 고등학교와 영역을 구분하기 위해, 고등학교의 널찍한 초록 운동장 옆으로 대학교는 키가 크거나 야트막한 나무들을 어슷하게 심어서 경계를 표시하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엔 여기에 벽돌 담장이 있었던 것도 같다. 담장을 허물고 나무들로 경계를 구분한 것은 시민으로서 매우 환영할만한 일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길들의 경계 지점에서는 대부분 두 가지 방향만이 읽히기가 쉬웠다. 이곳에서는 동서남북 사방 어느 곳이든 둘러볼 수 있어서 그랬는지, 여자는 그날 오래되지 않은 사람과의 산책도 마음이 불편하지가 않았다.


"그거 알아요? 학교 안에서 이렇게 남녀가 나란히 걸으면 동료로구나 생각하다가도, 캠퍼스 밖에서 둘이 걸으면 불륜이로구나 생각한다네요."


오래도록 알고 지내지 않아서 아직은 그 사람의 정체를 다 파악하지 못한 여자의 입에서 생뚱맞게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그런데 정작 그 말에 당황한 것은 남자가 아니라 불쑥 말을 내뱉은 여자였다. 조금 늦게 대학원을 다닐 때, 전공 교수와 드물게 캠퍼스 산책을 할 때가 있었다. 물론 스승과 제자라는 입장과 학점에 무척 예민했던 다른 젊은 대학원생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교수와 단 둘이 산책한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비록 젊고 활기 있는 학생들보다 나이는 먹었지만 이해력과 작문 실력이 뛰어나서 학점이 좋았던 것을, 교수와 친해서 높은 학점을 받았을 거라는 오해를 구태여 취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간혹 가다 산책길에 은발의 교수님들이 고상하고도 유쾌한 눈빛으로 담소를 나누며 오솔길을 나란히 거니는 모습을 마주할 때가 있었다. 지성과 인품이 어우러진 존재들의 교류를 목도하는 즐거움은 누드화를 음미하는 것보다 실제로 몇 배의 즐거움을 내게 안겨주었는데, 그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여자는 대학 시절 한 때 여성의 누드화 감상에 빠졌던 적이 있었기에 이 증언에는 한 치의 거짓이 없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여자가 단 한 번이라도 레즈비언의 유혹에 빠졌거나 환상을 가졌던 것은 결코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비슷한 보폭으로 나란히 길을 걷는다는 것에 굳이 의미가 필요한 것일까? 여자는 문득 그러한 질문에 도달하였다. 성별로서만 구분하여 바라보는 구태의연한 사회적 시선들의 거추장스러움에 여자는 갇혀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이라도 여자의 성 정체성이 바뀌어 그녀의 여자친구와 둘이서 나란히 길을 걷는다면, 사람들은 그들을 무엇이라고 볼까?


혼자 외따로 존립하는 것에 사소한 불안을 느끼는 대다수의 여자애들은 어릴 때부터 여자 친구와 손을 잡고 화장실까지 따라다닌다. 그 버릇이 습관이 되어 몸에 남아있다가 나이가 들어서도 여자 친구의 팔짱을 끼고 걷기도 하고 손을 잡고 걷기도 하는데, 내 눈엔 그것이 더 불편하고 거추장스럽게 보이는 건 무엇일까.


학교 앞 오래된 양옥집 담장에 옅은 핑크빛이 감도는 백장미가 흐드러지게 매달려 피어났다. 그 집의 담장과 나란히 서있는 옛날식 상가 건물 앞에 몇 개의 검은 고무 화분들이 줄을 맞추어 서있었는데, 싸구려 고무 화분들 안에도 하얀색인지 분홍색인지 불분명한 장미꽃들이 앞다투어 피어있었다.


얼추 늙은 여자가 낡은 담장에 피어난 백장미(?)에 또 탄성을 지르는 사이, 여자가 묻지도 않았는데 남자는 흑장미를 좋아한다고 혼잣말을 했다. 여자가 아주 고래 적에 던졌을 법한 질문 하나를 혼자 속으로 던져보았다. '나는 흑장미일까, 백장미일까?' 몇십 년 만에 자기 자신에게 그런 유치한 질문을 던져본 여자가 그리곤 혼자 웃었다. 이제 색깔로 구분할 장미꽃이 아니지 않던가. 할미꽃인들 어떠하며, 꽃이 아닌들 어떠한가.


살면서 분도 타인의 시선 따위에 스스로를 가두어본 적이 없을 것 같은 한 사내와 나이가 지긋한 여자가 어느 봄날 둘이서 길을 걸었다. 길을 걷다가 우연히 여자의 남편이라도 마주친다면, 그러거나 말거나다. 뭐 어쩔 테냐? 봄날의 정취가 좋아서, 캠퍼스의 젊은 기운이 좋아서 멋진 사내와 산책 좀 했다. 매일 드나들던 노부모의 집 가는 거 하루 좀 빼먹었다. 노랑나비도 보고 백장미(?)도 보았다. 아름다운 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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