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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Jun 05. 2023

(소설) 계절이 바뀌는 길 4

휴대폰 너머로, 끈끈하고 모호해서 음성인지 숨소리인지 분간이 어려운 진수애의 흐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애에게서 어떠한 대답이나 해결책을 구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수애는 나의 불만에 찬 통화를 듣고 어찌 되었건 수습의 모양새를 취하기 위해서라도 오대빵에게 전화를 걸 수도 있다. 나는 그 순간 수애를 믿은 것이 아니라, 아마도 오대빵 그녀의 명쾌함에 나 혼자 내기를 걸었던 것도 같다.


수애와의 통화가 끝나고 다음 날이었다. 저장되지 않은 낯선 번호로부터 문자가 한통 도착해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대빵 000입니다. 얼마 전 제게 연락을 주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저는 백현우 씨로부터 어떠한 문자와 링크 주소를 받은 적이 없어요. 아마도 제 연락처를 잘못 입력하신 것 같습니다. 혹시 제게 주실 말씀 계시다면, 확인 부탁드립니다.>


그 문자 한 통에 나는 기분이 몹시 좋아졌다. 그녀는 내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진수애는 잠자리를 같이 하고 나서 그 이후로도 줄곧 내 이름을 분명하게 알지 못했다. 일부러 같이 잔 남자의 이름을 정확하게 저장해놓지 않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오대빵 그녀와 셋이 함께 만났던 그날도 수애는 내 이름을 외우지 못하고 "대표님"이라고만 부를 뿐이었다. 그런 수애를 향해 오대빵 그녀가 한 마디 했었다.


"나무 대표님이 뭐야? 이름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백씨 아저씨'라든가 '백대표님' 정도는 적어두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날 그녀의 통쾌한 지적에 사실 나는 약간 부끄럽기도 하고 기분이 상하기도 했었다. 진수애를 사랑해서는 아니지만, 잠자리를 같이 했던 어떤 여자에게 내가 그 정도의 남자로밖에 취급되지 않는다는 것이 한편 분하기도 했던 것 같다.


오대빵 그녀의 문자를 확인한 순간 내 혈관을 타고 움직이던 기분은 순간적으로 나를 초록의 맑은 숲 속으로 공간 이동을 시켜놓기도 하였는데, 마치 오르막길을 단숨에 올라온 사람처럼 내 호흡은 약간 들떠 있었다. 나는 그 묘한 흥분과 설렘 속에서 가능한 만큼 오래 머물고 싶었다.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황홀하기도 한 이 순간의 흥분은, 성행위의 절정에서는 맛볼 수 없는 신선한 쾌락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라는 놈은 일상에서 느끼는 지루함이나 심심함 따위에 나를 빼앗겨본 적이 없는 놈이다. 행복하기 위해 선택한 이혼이었기에 거기엔 어떠한 미련이나 후회도 없었으며, 상실감이나 우울감에 잠시라도 젖어든 기억이 없다.


늘 만족스럽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었는데, 그녀의 문자를 받는 순간 나는 내 속에 도사리고 있는 공허 하나를 목도한 기분이 들기도 하였다.


'여자에게서 연락 오는 것이 처음도 아닌데... 왜 이런 거지? 내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건가?'


새로운 여자를 알게 될 때마다 언제나 이런 '공간이동'이나 '순간 멈춤'의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와 몸으로 사랑을 나누기 전에 일종의 에네르기가 형성될 수 있는 것은 결코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그녀의 문자를 확인하고, 몇 분 뒤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애씨를 통해 전달하다가는 아마 이 생에서는 연결이 어려울 거 같아서, 제가 직접 대표님 연락처 받아서 문자 드렸어요. 저는 뭐든 확실한 걸 선호하거든요. 그런데 제게 용건이 있으신가요?"


그녀는 아나운서 같은 발성으로 또렷하게 내게 물었다. 용건이라~ 그렇지,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에도 그녀는 구체적인 용무가 없는 만남이나 통화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었다.


"아~ 용건요? 있어요, 만나서 얘기합시다. 제가 출판업도 하고 있다고 그때 말씀드렸었던가요?"


물론 나는 출판업을 하는 사람은 아니다. 다만 친구가 경영하는 출판사의 공동대표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그녀에게 아주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닌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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