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라지 Jun 03. 2023

(소설) 계절이 바뀌는 길 3

봄비가 내리던 그 밤에 나는 어느 조촐한 호텔에서 수애와 잠깐 실랑이를 했었는 지도 모른다. 남자와 잠자리를 하는 것만이 예술가로서의 삶에 유일한 원동력이 되는 것인 양, 수애는 그 밤도 일념으로 전진할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수애와 나를 버리고 도망간 그녀에 대한 미련인지 원망인지 불분명한 마음의 경계에서 수애에게 그녀의 연락처를 물었던 것도 같다.


수애는 먹잇감을 사냥하는 남자들의 고전적인 수법을 따라 하길 좋아해서, 술을 마신 뒤 언제나 이차로 노래방을 가곤 했다. 수애동행했던 그녀는 매우 자신 있는 말투로 노래방에서 져 본 역사가 없노라고 선포했었지만, 그 밤에 그녀는 나에게 무참히 패하고야 말았다.


내가 다섯 번을 이기고 그녀가 다섯 번을 졌던 날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우리는 노래방에서 나와 "오대빵"을 외치며 빗속을 잠시 셋이서 걸었던 기억까진 선명하다. 그 빗속에서 그녀가 사라졌던 것인지, 아니면 수애와 나를 호텔에 데려다주고 줄행랑을 친 건지 그 부분에서부터 기억은 흐릿해지기 시작한다.


대전을 다녀오고 며칠 뒤, 나는 내 폰에 저장되어 있는 "오대빵"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매사에 명쾌해 보이던 그녀에게 어떠한 답이라도 올 것을 기대했었는데, 그녀는 한 마디 답장도 주지 않았다. 진수애는 자신의 애인과 떠나는 일박이일 요트 여행에 꼭 참석해 달라는 전화를 내게 다시 걸어왔다. 보름 전 요트를 계약하면서, 수애는 내게 동행 제안을 했었다. 나는 농담처럼 "오대빵"이 간다면 참석하겠노라고 답을 주었다.


수애가 요트여행 건으로 그녀와 통화를 한 건 사실이었다. 그녀는 당연히 거절을 했다. 그녀의 불참석을 전해 듣고 나도 수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른 남자와 키스하면서 또 다른 남자를 자극시키는 기술 따위에 휘말려들만큼 나는 서투른 사내가 아니었다. 진수애의 쾌락을 위하여 동원되는 무수한 남자들의 대열에 서야 할 만큼 나는 궁한 놈이 아니다.  


나는 가끔 스스로에게 물을 때도 있었다.


'나는 왜 진수애를 만나는 거지?'


수애를 처음 만났던 날, 물론 수애에게 호기심이 생겼던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유럽에서 십오 년, 자칭 세계적인 아티스트, 대학 교수, 그러한 외적인 요소들로 수애가 자신을 우선 포장하여 진열대 위에 세워놓은 뒤 놀라운 친화력으로 신속하게 술잔을 비우기 시작하면, 진수애는 어느새 섹시하고 멋있는 여자로 보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수애가 나쁜 구석이 있는 여자도 아니다. 적어도 진수애는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 따위는 저지르지 않는다. 나는 수애의 작업에 필요한 나무를 조달해 주고, 수애와 가끔 술을 마시고 잠을 자기도 한다. 나는 그렇게 수애와의 인연을 계속 이끌어갈 만한 이유를 정리해 두었다.


진수애와 통화라도 한 날이면, 내 마음속에 넣어두었던 종이상자 하나가 툭 하고 떨어져서 그 안에 들어있던 잡동사니들이 바닥을 어지럽히고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하였다. 그러면 나는 황급히 바닥을 청소하고 종이상자를 다시 제 자리에 놓는다.


그러고 나서 생각이란 녀석은 '무슨 이유를 만들어야 오대빵 그녀와 인연을 이어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러다 문득, 진수애가 내게 적어준 오대빵 그녀의 전화번호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진교수, 오대빵 그 친구는 왜 그래? 사람이 문자를 보내면 답장을 하는 게 매너 아닌가?"

작가의 이전글 (소설) 계절이 바뀌는 길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