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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Jun 02. 2023

(소설) 계절이 바뀌는 길 2

기묘하다는 말 외에는 다른 적당한 표현을 찾을 수 없는 그녀의 목소리를 처음 들은 건 수애와의 약속이 잡혀있던 날이었다. 밤은 깊어졌는데 두꺼운 외투의 단추부터 조심스럽게 하나씩 풀고 있는 처녀의 망설임이 스며들어있는 것 같은 계절이었다. 얼어붙어있던 겨울 대지 위로 따뜻한 봄햇살이 비추고는 있지만, 저 깊은 곳의 차가움은 미처 녹이지 못한 그런 계절이기도 하였다.


계절이 그런 시간을 주춤거리며 걸어가고 있을 무렵, 마침 그날은 봄을 재촉하는 비가 제법 그득하고도 운치 있게 내렸었다. 봄비는 처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기왕 여성이 되기로 하였으면 망설이지 말고 후딱 원초적인 몸으로 변신하라고.


수애와의 약속을 잊은 건 아니었지만, 그 전날 과음한 탓으로 나는 수애에게 약속 날짜를 변경할 것을 부탁했었다. 수애는 특유의 콧소리와 꼰대 기질을 발휘하며 기어이 나를 대전으로 불러들이는 데 성공했다.


"대표님, 나 수애야~ 수애가 부탁하는 건데 안 들어줘? 이건 부탁도 아니잖아. 이미 약속이 되어있던 거잖아요."


언제부터 수애가 나를 '대표님'이라고 호칭한 건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하지만 누가 나를 가리켜 촌스럽게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대표님"이라고 불러주는 것이 한결 엣지 있어 보이는 것만은 틀림없다. 게다가 수애에겐 구태여 다른 호칭으로 불러달라고 요청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아마도 그날 대전에 가고 싶지 않았던 것은, 수애의 욕망을 충족시켜 줄 체력이 남아있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자신의 여성성으로 세상 모든 남자를 굴복시킬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는 진수애는, 시간과 장소에 아랑곳하지 않고 상대의 욕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자신하는 여자 중 한 명이다. 대전에 가면 어김없이 밤을 보내자 할 텐데, 그날은 도무지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차가운 봄비에 푹 젖은 듯한 몸을 이끌고 수애가 예약해 두었던 일식집에 도착했을 때 수애는 아직 오지 않았다. 오늘 모실 손님은 여성 두 명, 나는 메뉴판에서 코스요리 중 비교적 저렴한 걸로 3인분 미리 주문해 두었다. 룸밖에서 수애의 들뜨고 터무니없이 끈적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애의 목소리에선 아직 오지 않은 지루한 장맛비 속의 눅눅한 열기가 연상되었다.


'수애와 동행하는 여성 친구라면, 글쎄, 수애처럼 모든 남자를 섭렵하려는 또 한 명의 여성이 아닐까.. 얼굴이나 이뻤으면 좋겠는데~'


이왕 밥을 살 바에는 예쁜 여자에게 사는 게 덜 손해 보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 법이다. 역시, 나의 주문은 효력이 있었다. 수애와 함께 들어온 여자는 흔하게 보이는 예쁜 얼굴은 아니었다. 어딘가 묘한 위엄까지 있어 보이는 그녀는 성품이 꼿꼿하지만 삐죽해 보이진 않았다. 보기 드문 인상이었지만 내 눈엔 그래도 '예쁜 여자'로 투영될 뿐이었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에 대하여 첫인사만큼은 공정해야 한다는 원칙이라도 지키려는 듯이, 그녀의 목소리와 눈빛은 담백하고 깔끔했다. 상대를 제압하려거나 혹은 상대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 보이려는 일체의 감정이나 의도를 실지 않은 그녀의 눈빛은 고요한 숲 속의 어느 나무를 닮은 듯도 하였다.


"수애씨는 내가 무얼 하는 사람인지도 잘 몰라요. 타인에게 전혀 관심이 없거든요. 아, 물론 남성들은 한시적으로 예외일 수 있어요. 그래서 수애씨 작품엔 '타인들'이 등장하지 않는 게 아닐까요? 수애씨 작품에서 매우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하죠."


깊은 숲 속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처럼 조금 굵고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풀어가던 그녀가 진수애의 품에 대해 몇 마디 언급할 때, 나는 그녀 생각에 적극적으로 동의를 표시하였다. 진수애는 내가 조달해 주는 나무로 조각을 하거나 또 다른 소재의 작품을 제작한다. 나의 본업은 예술 쪽과 무관하지만, 나는 예술가들과 어울리길 좋아하고 예술 자체를 흠모한다.


수애의 언어가 테두리가 불분명하게 그려진 흐물거리는 화라면, 그녀의 언어는 사물들의 경계와 경계를 명백하게 밝히기 위해 공들여 채색한 수채화 같은 느낌이었다. 봄비가 내리던 그날 저녁, 내 앞에 앉아있던 두 여성은 서로 다른 별에서 온 것처럼 사뭇 달랐지만 어딘지 모르게 닮은 구석이 있을 것도 같아 보였다. 저 여자가 수애처럼 남자를 밝히는 여자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명쾌한 화법은 자칫 아둔한 남자들에겐 범생이 스타일로 비칠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놈들과 다른 놈이다. 그녀의 영특한 두뇌 속에 순수한 마음과 뜨거운 열정이 가득 고여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놈은 드물 것도 같았다.


새로운 여자는 늘 신선한 법이지만 그날따라 나이가 든 그녀는 유난히 싱그러웠고, 어제 먹은 술 위에 다시 얹는 술이지만 술맛도 유난히 달콤했었다. 그 밤에 나는 그녀와 함께 있기를 몹시 갈망했지만, 그녀는 어느 순간 사라지고 나는 수애를 처음 만났던 밤처럼 술에 취한 채 또다시 수애와 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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