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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Jun 01. 2023

(소설) 계절이 바뀌는 길 1

그녀와 헤어지고 며칠이 지났다. 그날 하늘엔 텁텁한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었다. 늘 무엇엔가 쫓기듯이 차에서 내리는 그녀에게, 나는 그날도 역시 장난스럽게 말했었다.


"사랑해요~라고 해봐"


이제는 그런 농담에 놀랍지도 않다는 얼굴로 그녀가 차문을 닫으며 낮게 말했다.


"잘 가요~"


내가 잠시 도로 위에서 멈칫거리는 사이, 차의 출발 속도보다 빠른 걸음으로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만큼 걸어갔다. 아파트 옆 공원에 초록의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난 길에는 갈색 매트가 길게 깔려있었다. 그녀가 떠나버린 차의 열린 창문 너머로 나는 그 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때 난 순간적으로 그녀의 앞날에도 영광스러운 레드카펫의 길이 열리길 기도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순간에 둘이서 함께 걸어갈 길에 대한 소원이 아니라 그녀의 인생길에 대한 축복을 염원했다는 것이 조금 이상하기도 하지만, 그날 나는 그 길을 걸어가는 그녀에게 놀라운 신의 축복이 내려지길 기도했었다.


그렇다고 그녀와의 앞날을 전혀 상상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날 그녀와 헤어지기 전까지도 우리는 둘이서 함께 사는 모습을 그려보며 키득거렸다. 그녀는 헐렁한 몸빼바지를 입을 때도 내가 그녀의 옷차림에 대해 언급하면 안 된다는 조항까지 계약서에 집어넣어야 한다고 했었다.


타인의 개입 없이 둘이서 처음 만난 날부터 우리는 2인 공동체 생활을 위한 규칙을 작성하는 것에 동의했었는데, 아마도 그녀가 자신의 옷차림에 대한 조항까지 달려고 했던 건 나의 "엣지 있게"라는 생활신조를 의식해서였던 것일 수 있다.


물론 나의 대답은 "of course~"였다. 그녀는 몸빼바지를 입어도 사실 엣지가 없을 수가 없다. 훤칠하게 군더더기 하나 없는 그녀의 몸매는 그녀의 오십 년의 삶과 앞으로의 삶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는 것이라는 걸 그녀는 알지 못하는 듯했다.


나는 그녀를 처음 본 날, 예의 버릇처럼 내가 인연을 맺었던 여자들의 이름을 머릿속으로 주욱 나열해 보았었다. 많은 여자들이 "내가 당신의 몇 번째 여자예요?"라고 묻곤 했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날 때마다 '이 여자는 몇 번째가 되겠군~'하고 의례 번호를 매기곤 하였다.


물론 마음에 들어 잠자리까지 가져보고 몇 번을 만나기도 한 사람 중에도 뒤돌아보면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여자도 더러 있었다. 시간이 흘러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 가운데서도 사람이 더욱 그러하다는 걸 깨달았지만, 그런 걸 안다고 해서 즉흥적으로 뻗어 올라오는 나의 욕망이 좌절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일 것이다.


그런데 그녀를 떠올릴 때는 나의 욕망이 요동치는 것이 아니라 입가에 미소가 가만히 번지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어느 한적하고 아늑한 장소에서 혼자 캠핑할 때나 느낄 수 있었던 잔잔한 행복이 그녀에 대한 기억을 통해 찾아오기도 하였는데, 그 또한 내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마음의 움직임이 아닐 수 없었다. 종교의식처럼 그 마음의 움직임들이 다녀간 뒤에야 그녀를 향한 욕망이 불타오르기도 하는데, 그것은 마치 성체(그리스도의 몸)를 받아 모시기 위한 예식에 다다르기 위해 미사를 드리는 것과 같이 느껴지기도 하였다.


내가 순결한 이십 대의 청년도 아니고 결혼해서 아이 둘까지 키운 놈이 아니던가. 큰 딸이 몇 년 후면 서른인데, 이 나이에 오십된 여자를 보고 이런 기묘한 감정을 느끼게 될 줄은 차마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첫사랑 때 느꼈던 감정이 이런 것이었나? 나는 아주 오랜만에 그런 질문을 혼자 던져보았다. 첫사랑의 얼굴은 선명하게 떠오르지도 않는데, 자꾸만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약이 바짝 오르거나 무언가 호기심에 사로잡혀 궁금해 미치겠다는 표정을 지을 때면, 그녀의 콧등은 휴대폰의 이모티콘처럼 찡긋하고 접혀서 올라가곤 했는데 나는 지금도 그 표정이 몹시 그리워지고 있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도 참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녀에겐 몇 가지 금기시되는 행동들이 있는데, 그녀는 누군가와 휴대폰으로 통화하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사람 얼굴을 보지 않고 대화를 나누는 게 얼마나 상상력을 발휘하게 하는데 통화하는 걸 싫어하죠?"


"그래서 싫어요. 음성만으로 통해 전달되어 오는 그 미묘한 감정의 변화들, 언어와 언어가 잠시 쉬어가는 사이에 느껴지는 호흡의 질감들, 그 모든 것들이 나의 육감(六感)까지도 사용하게 만들어버리는 그 상태에 놓이는 게 너무 거북스러워서요."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도달할 수 없는 아득한 유토피아 같은 것이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깊이를 알 수 없는 허무인지도 모른다. 지혜를 갈구하는 자에게는 가르침을 주기도 하다가, 탐욕을 부리는 자에게는 열린 판도라의 상자처럼 온갖 욕망들을 선물하기도 할 것만 같은 기묘한 목소리를 그녀는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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