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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Jun 07. 2023

(소설) 계절이 바뀌는 길 5

아직 한낮의 대학가는 흥청거리는 멋이 없어 조금 심심한 시간이었다. 그녀와 내가 단 둘이서 처음 만났던 날, 너무 쉽게 나를 만나준 그녀에게 내가 먼저 물었다.


"그런데 왜 용건이 뭐냐고 묻지 않나요?"


그녀는 질문이 조금 시시하다는 표정을 장난스럽게 지으며, 오래된 친구에게 말하듯이 편안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현우씨는 그냥 나라는 사람이 궁금해서 온 거잖아요. 전화를 끊자마자 대전으로 온 걸 보면, 현우씨는 지금 unstable한 상태에 있거나 매우 열정적인 사람인 거죠. 어느 쪽이 되었든, 현우씨는 아주 빠른 시간 안에 나를 보기 위해 달려왔을 사람이에요."


"내가 불안정해 보인다고요? 나처럼 평화롭고 stable한 사람 만나보기 쉽지 않을 텐데요."


"그건 맞아요. 현우씨는 비교적 stable한 사람이에요. 그런데요~ 무슨 이야기가 궁금할 적에 빨리 그 책을 사보는 편이 낫잖아요. 나는 현우씨가 나라는 사람책에 대한 파악을 빨리 마치도록 시간을 앞당겨주는 역할만 하는 거랍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재밌다, 재미없다는 독자의 판단이고요, 이 책을 소장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는 것도 독자의 몫이라서요."


그녀는 내가 세상을 바라보고 사물과 관계 맺는 방식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는 듯했다. 대상에게 호기심이 생기면 기어이 돌진해서 어떠한 끝이든 보고야 마는 그런 승부사적 기질을 가지고 있는 나라는 놈은, 그 기질 덕분에 사업을 꽤 성공적으로 끌어올린 적도 있었고 또 그 기질 때문에 가끔 손해를 본 적도 있었다.


그녀는 수애와 함께 처음 만났던 날보다 더 유쾌하고 대화에 주저함이 없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길 만드는 데, 사람들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해요. 후훗, 전 안 그래요. 우리 나이쯤 되면 한 시간 정도만 이야기를 나눠봐도 상대방이 어떠한 사람인지 제법 감이 오잖아요. 나이 들면서 다른 감각들은 조금씩 쇠퇴하는 것도 같은데, 이상하게 육감이 더 발달하더라고요. 저는 본능적으로 나의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을 감별하는 거 같아요. 아까 통화할 때 현우씨가 제게 던진 '출판' 미끼를 물고 나온 게 아니라, 우리가 친구라는 길을 잘 낼 수 있을지 타당성 조사 차원에서 나왔다고 생각하시면 될 거예요. 흐흐흐~"


내 눈을 또렷하게 응시하며 막걸리를 마시는 그녀의 언어는 솔직하고 어디에도 구속된 바 없이 자유로웠다. 남자와 여자가 처음 만날 때, 많은 여성들이 '자신'이라는 감옥에 갇혀 남자에게 우스운 여자로 보이지 않기 위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덧칠하고 치장하느라 아까운 시간들을 공허하게 낭비할 때가 대부분이었다. 그녀는 그런 낭비와 에너지 소모가 자본주의 사회와 매우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며 웃었다.


"이 세상에 우정만큼 값진 게 없다는 걸 진짜로 아는 사람은 드물어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른 것들은 얼마든지 자본으로 해결되잖아요. 하지만 우정은 꽤 많은 시간이나 자본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거든요. 두 사람의 순수한 진심, 이게 있을 때 비로소 우정이 탄생하죠."


"쌤은 우정이 생명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탄생이라고 말씀하셔서~"


나는 그녀를 무어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서, '쌤'이라는 통칭을 불쑥 꺼내 쓰고야 말았다.


'에이구, 멍충이.. 저 여자가 스승님도 아닌데, 갑자기 '쌤'이라니.. 여자한테 '말씀하셔서'는 또 뭐고..'


무언가에 휘말려드는 것처럼 내 페이스를 잃어버리고 있는 사이에, 나이는 들었지만 여전히 커다란 눈동자가 반짝거리는 그녀는 세상의 모든 순간과 모든 사물이 재밌어 죽겠다는 미소를 고 있었다. 잘 생긴 남자와 한참을 바라보며 이야기해도 흔들리지 않는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갑자기 내 경험의 데이터값에서 오작동이 발생하고 있었다.


"우정은 '생명'이 맞아요~ 암탉이 무정란을 낳았다고 해서 거기에서 병아리가 태어나지는 못하잖아요. 남자와 여자가 만나 생명을 잉태하듯이,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우정을 잉태하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얼마나 멋진 일인가요? 그런 멋진 우정을 생성하는 건, 이 세상에서 극소수의 사람들뿐일 지도 몰라요. 수애씨와 함께 현우씨를 처음 본 날, 나는 그 가능성을 생각해 봤던 것도 같아요."


나는 그녀의 언어를 이해하는 것도 같았지만, 정작 어려운 책을 읽고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하였다. 여자에게 한 번도 밀려본 적 없는 내가 어느 코너에서인지 밀리고 있는 것도 같았다. 내가 여기 온 목적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나는 자꾸만 스스로를 격려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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