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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Jun 08. 2023

(소설) 계절이 바뀌는 길 6

내가 여자들에게 목적이 있었듯이, 여자들이 와 만날 때도 반드시 목적이 있었다. 대체로 여자들은  근사해 보이는 남자와 로맨틱한 사랑에 빠지는 판타지를 가지고 있는 편이다. 그 판타지 속에 그녀들의 욕망을 교묘하고도 우아하게 숨겨 놓는다. 그런데 이 여자는 내 시간이 낭비되는 걸 막 위해 이 자리에 나왔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너를 남자로 보지 않으니, 공연한 시간 낭비 말아라.'


그녀의 '우정론'은 결국 이런 뜻일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나란 놈이 그녀고상한 품격에 감동을 받고 그저 순순히 물러설 수밖에 없는 만만한 상대는 아니라는 걸 그녀가 알아차리기엔, 우리가 함께 나눈 시간이 턱없이 모자랐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여자들은 대체로 질투심 앞에서 감추어 두었던 본색이나 욕망을 드러내 보이기도 다. 나는 그녀의 질투심을 건드려볼 생각으로 이렇게 말해 보았다.


"그런데 쌤은 진교수와 알고 지낸 지 십 년이 넘었다고 했던가요? 진교수 받아주는 거 쉽지 않았을 텐데요."


진수애로 화제를 넘기면서 나는 아주 잠깐 복잡한 마음이 들기도 했었다. 내가 가끔 잠자리를 같이 하는 여자를 우리의 공통된 이야기 소재로 삼아야 한다는 게, 왠지 내게 이롭기만 할 것 같지는 않아서였다.


"십  동안 수애씨 레퍼토리와 매뉴얼은 한결같죠~ 수애씨 처음 알게 됐을 때는 호기심에 관찰을 했던 거 같아요. 그러다가 술자리에서 한 열 번쯤 똑같은 모습을 보고 난 뒤에, 일 년 정도 수애씨 연락을 피한 적이 있어요. 별의별 생각들을 나 혼자 했던 거예요. 그런데 그게 그럴 일이 아니더란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수애씨가 취하고자 하는 욕망의 대상도 아니고, 수애씨와 남자를 두고 경쟁하는 사이도 아닌데, 내가 그녀의 행동을 재단할 필요는 없는 거죠."


순간적으로 나는 그녀가 성적으로 불감증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기도 했다. 내가 알고 있는 여성들은 모두가 질투의 화신이었다. 여성들의 질투심은 어떤 때는 잠자리와도 무관했었다. 여성에 관해서라면 고도로 훈련된 내 눈에도 '저 여자가 왜 저러지?'싶을 정도로 이해불가한 경우도 수없이 겪어봤다. 근거 없이 질투하는 여자들을 볼 때마다 사뭇 신기할 정도였는데, 이 여자는 기존에 나와있는 데이터값이 적용되지 않는 데다 예측을 할 수 없어서 한층 더 신기할 따름이었다.


내가 그녀에 대한 터무니없는 의심을 하고 있을 때, 그녀는 표정에 아무런 동요도 없이 지나가는 말투로 이렇게 말을 흘렸다.  


"영화에 보면 가끔 그런 남학생 등장하잖아요. 내가 누구누구를 take 했다~ 수애씨도  앞에서 남자들 이름을 자꾸 리스트업 시키던걸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게 거울이 있었다면 수백 개의 백열전구가 켜진 것처럼 붉은빛으로 물든 내 얼굴을 똑똑히 보게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녀는 내가 수애와 잠을 자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 머릿속은 뒤죽박죽 엉켜버렸다. 그런 경우 다른 여자들은 이런 자리에 나오지 않는다. 자신의 친구 혹은 지인과 잠을 자는 남자가 자신에게 추파를 던지는 것을 스스로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 수애같은 여자는 쉬운 여자고, 나는 그런 쉬운 여자가 아닌 걸~>


그리고 자신들의 "어려움"을 반드시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남자의 제안을 적어도 두 번 이상 거절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여자는 아니었다.


'이 여자 뭐지? 진짜 불감증인가?'


나의 의심은 증폭되었지만, 나의 마음은 오히려 한결 가볍고 평화로워진 느낌이었다. 감추고 있던 죄를 들키고 나서 아내의 처분을 바라는 남자의 심정이 이러할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전 와이프는 자신의 외도가 들통나고 나서도, 내가 준 세 번의 기회를 다 망쳐버리고 떠나갔었다.


그녀는 나의 뒤엉킨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유쾌한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수애씨 그거 병증 같아요. 가 의학적으로 지식이 짧아 뭐라고 잘 설명은 못하겠지만, 그건 아무래도 병이 분명해요. 어릴 적에 형성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가 이런 증세로 발현되었을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고요."


나는 그녀의 탐정 같은 눈빛과 신중한 말투에 깊은 동지애를 느끼며 그녀의 말에 덧붙였다.


"제 생각엔 에폭시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진교수가 작업할 때 쓰는 에폭시가 뇌 속의 신경 물질을 변형시켰을 확률이 높아요."


그녀는 새로운 것을 발견한 사람처럼 몹시 신나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내게 진지한 아이처럼 물었다.


"정말 궁금해지네요. 수애씨가 에폭시를 쓰는 작업을 멈춘다면, 행위 자체가 달라질 수 있을까요? 마녀가 요정이 될 수도 있는 거라면, 결국 마녀도 요정도 같은 거네요~"


탐구심에 들뜬 그녀의 눈빛에서, 나는 먼 기억 속에 아득히 서있는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을 발견하였다. 내 유년 시절의 호기심에 찬 순수한 눈빛이 저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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