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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Jun 30. 2023

(소설) 계절이 바뀌는 길 12

오십여 년 전 준석의 아버지가 헐값에 이 땅을 사들일 때 준석의 어머니는 코웃음을 치며 반대했다고 한다. 화교 출신인 준석의 부모님은 인천에서 중식당을 운영하며 알뜰하게 돈을 모았을 것이다. 외아들인 준석에게 물려줄 3층짜리 건물 하나를 지어 올린 후, 준석의 아버지는 그 당시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은 섬들을 왕래하며 서쪽 섬의 땅들을 싸게 사들였다.


인천국제공항을 건설하기 위해 대규모 간척사업이 진행되면서, 준석의 아버지가 사두었던 섬의 땅들은 하나의 거대한 섬으로 연결되어 눈부신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고야 말았다. 준석의 부모님은 인천국제공항에서 비행기들이 처음으로 이륙할 즈음에 남해 여행 중 안타깝게도 나란히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준석이 어쩌다가 제재소를 운영하게 되었는지는 자세하게 들어본 적이 없다. 중국 음식의 기름진 냄새를 좋아하지 않는 준석은 대학에서 조경학을 공부했다고 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준석이 조경 사업을 먼저 시작했든 제재소를 먼저 지었든 그것은 중요할 게 없었다. 지금은 땅값이 오를 대로 올라있는 그 많은 땅을 소유한 준석이, 현재도 조경 사업과 제재소 사업을 매우 성공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다는 것이 차라리 중요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서해를 향하여 새의 부리처럼 뾰족하게 뻗어있는 땅 위로 공교롭게도 봉긋하게 솟아오른 언덕배기에 준석은 나무로 집을 지었다. 준석의 집 아래로 제법 널찍하게 펼쳐진 모래사장을 우리는 "트루스(truth) 비치"라고 불렀는데, 그 트루스비치는 준석의 사유지와 다를 바가 없었다.


제재소 옆으로 깔려있는 푸른 잔디밭 위에서 나는 스페인 요리를 몇 가지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내놓았다. 준석과 여진이 나를 드러내놓고 좋아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나의 '음식'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어느 자리에서든 사람들에게 요리해 주는 것을 즐기는 습관은 내가 어릴 적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만든 음식을 먹이는 즐거움은 어쩌면 생존을 위한 전략적 차원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타인에게 받고 싶은 행동을 내가 먼저 그들에게 해주자' 나는 이런 마음으로 사업을 일구어왔으니 말이다.


나는 요리를 하면서 지안을 생각했다. 내가 만든 음식을 그녀에게 대접해주고 싶다고 두세 번 말했지만, 지안은 한 번도 내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둘이서 함께 캠핑을 가게 되면 큰 일이라도 날 것처럼 지안은 아직도 나를 경계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수애와 여진은 내가 만든 음식들을 칭찬하면서도 음식을 많이 먹지는 않았다. 여진이 늘 체중 관리에 예민한 편이라면, 수애는 음식보다는 술에 급급한 편이었다.


어느덧 바다 위로 붉은 노을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우리는 적당히 술에 취한 채 제각각 양손에 와인과 주석 와인잔을 들고 트루스비치를 향해 맨발로 걸어갔다. 나는 맨 뒤에서 기타를 집어 들고 무리를 따라 움직였다.


"아가씨들, 발 조심하세요~모래사장까지 가기 전엔 돌부리를 조심해야 합니다. 귀여운 발들에 생채기라도 나면 어떡합니까~"


출판사를 경영하는 환규는 능청스러운 데가 있는 놈이다. 저런 능청스러운 면이 환규의 매력이기도 해서, 나는 어지간하면 환규를 내가 앉는 테이블마다 동행하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저런 능청스러운 멘트를 서슴없이 아무 때나 날리는 녀석이, 우리 가운데 초혼을 유지하며 살고 있는 유일한 놈이라는 사실이다.


트루스비치엔 낭만과 쾌락을 즐기는 무리를 위하여 모든 게 흠잡을 데 없이 준비되어 있었다. 대형 파라솔과 의자들, 썬베드들이 여러 개 놓여 있는 모래밭 위에는 커다란 담요와 수건들이 담겨있는 상자들도 여럿 보였다.


"어머, 너무 낭만적이에요~ 저기 하늘 위에 달 맞지요? 뷰~~ 티풀이네요.."


수애의 탄성이 짙은 청색으로 물들어가는 바닷가에 공허하게 퍼져나갔다. 수애는 아무도 대꾸를 안 해주자 더욱 호들갑을 떨며 그녀의 감탄에 동의를 구하였다. 또 성격 좋은 환규가 익살스럽게 대꾸해 주었다.


"그 달님 아래 골드스타가 따라왔네요~ 진작가님처럼 빛나는 별이요."


그날은 별빛보다 달빛이 유독 밝은 저녁이었다. 준석이 블루투스로 연결해 놓은 음악이 잔잔하게 흘러나오자, 별빛 아래서 들려온 작가님이라는 호칭에 한층 들떠버린 수애가 와인잔을 연거푸 비우고 나서 살랑살랑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아무도 수애의 몸짓에 크게 신경 쓰지 않은 듯 보였지만, 기다란 얼굴의 미인형인 여진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날카롭게 접히는 것도 같았다.


굵은 붓으로 단 번에 그어버린 캔버스처럼 모래밭 위로 어둠이 순식간에 내려앉았다. 달빛과 별빛이 모래사장 위에서 재즈음악 소리와 함께 부서져 내렸다. 수애의 몸짓은 그다지 화려하지 못하지만 그럭저럭 그 밤과 어울려지고 있는 것도 같았다. 수애의 남성을 향한 무작위적 기술력은 더 이상 내게는 하나도 신선할 것이 없었기에, 나는 화로에서 피어나고 있는 불꽃을 응시하며 지안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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