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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Jun 28. 2023

(소설) 계절이 바뀌는 길 11

지안과 나누는 대화들은 한계도 경계도 없이 자유로웠지만, 또한 특별한 진전도 없이 허무한 날들이 흘러갔다. 나는 장난스럽게 그녀를 끌어안아 보기도 했으나, 지안은 훈련받은 군인처럼 강한 힘으로 내 품에서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갔다. 지안과의 낭만적인 밤을 꿈꾸는 나의 모든 계획과 몸짓은 매번 수포로 돌아갔다.


지안에 대한 열망은 시름이 되어 나를 약간 우울의 늪으로 던져 놓을 무렵이었다. 토요일에 특별한 약속이 없는 날이면 나는 영종도에 있는 준석의 제재소로 향하곤 했었다. 그날은 준석의 두 번째 결혼기념일이기도 하였다.


제재소 앞에는 집주인들 차 외에 벌써 두 대의 차량이 주차돼 있었다. 빨간색 미니쿠페가 서있는 것으로 보아 수애가 먼저 도착해 있을 거라고 짐작이 들었다.


수애의 작품에 쓰일 나무를 나는 준석의 제재소에서 조달해 주었다. 수애의 새집에 인테리어로 쓰일 목재까지 공급해 준 사람이 나였지만, 수애의 차를 본 순간 모든 행동들이 섣불렀다는 후회를 잠시 했던 것도 같다.


내가 막 제재소 안으로 들어설 때, 수애는 이미 내 지인들과 인사를 마친 상태였다. 대단한 천재 예술가가 겸손하기까지 한 모양새를 흉내라도 내려는 듯이 수애는 낯선 사람들을 처음 만나는 어디에서나 작은 여자아이처럼 생글거리며 인사를 건네곤 하였는데, 아마 방금 전에도 수애는 그런 인사법으로 사람들을 안심시켰을 것이다.


수애는 연보랏빛 블라우스에 커다란 패턴이 그려진 블랙 스커트를 입고 내 지인들과 함께 제재소 한편에 서있다가, 제재소 안으로 들어서는 나를 발견하고는 점잖게 손까지 흔들어 보였다. 준석이 나를 발견하고 굵은 목청으로 환하게 외쳤다. "오셨어요, 형님~"


내 뒤로 도기 팔찌의 짤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준석의 아내 여진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이 넓은 대지와 목재가 가득 쌓여있는 제재소와 그림 같은 집이 마치 다 자기의 소유인 양, 여진은 당당하고 위엄 있는 자태로 들어와서는 수애를 눈여겨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 처음 보는 분이 계시네요. 안녕하세요, 저는 이 집의 안주인 송여진이라고 해요~"


'이 모든 것들의 주인인 김준석이 내 남자다, 함부로 까불지 마라'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의 송여진이 기품 있게 내민 오른손에는, 송여진을 제외하고 그 자리에 유일한 여자인 진수애를 향한 일종의 경고등이 깜빡이고 있는 것 같았다.


진수애는 신체적으로 자신보다 우월한 여성들과 대낮에 승부를 보거나 경쟁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잘난 체하는 여자를 마냥 너그럽게 보아 넘길 수만도 없는 타입이었다. 수애가 왼손을 내밀어 여진의 오른손을 잡으려는 제스처를 하다가 이내 팔을 거둬들이며 말했다.


"어머, 죄송해요. 제가 왼손잡이라서 무심코 왼 팔을 내밀었네요. 호호~ 저는 00 대학교 교수 진수애라고 해요. 그런데 저는 "작가님"이라는 호칭이 훨씬 더 좋더라고요. 교수라는 직업도 재밌지만, 저는 조각가로서의 진수애를 가장 많이 사랑하거든요~ 이해하실 수 있으시겠죠?"


"천재들이 원래 왼손잡이가 많다잖아요~ 하하하"


준석이 사람 좋은 웃음을 허공 중에 날려 보내면서 급하게 말했다.


"아~, 네. 교수시로군요. 저도 이 남자만 안 만났더라면, 지금쯤 서울대에서 박사 마치고 최소 국립대 정교수 정도는 하고 있을 텐데 말이죠.."


송여진이 진수애와의 첫 게임에서 패배한 선수처럼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진씨가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영종도 재벌집 사모님께서 피곤하게 교수일을 왜 합니까? 여진씨는 아름답고 우아한 사모님이 천직이십니다~ 안 그런가?"


모두들 내 말에 웃으며 동의하는 것으로, 수애의 신고식은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준석의 집은 바다가 바라다보이는 언덕에 자리하고 있었다. 제재소와 정원 부지, 그리고 조경 회사의 땅까지 합치면 그야말로 준재벌 못지않았다.


얼마 전 준석과 여진은 크게 다툰 적이 있었는데, 며칠 뒤 조경 회사에 딸린 농장 부지는 여진 앞으로 명의 변경되었다. 여진은 국립대에서 삼십 년 동안 교수직을 수행한 사람의 평생 급여와 연금을 합친 것보다  배 이상의 재산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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