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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Jun 26. 2023

(소설) 계절이 바뀌는 길 10

대학가의 거리 위로 잿빛의 땅거미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지안과 마주 앉은 식당 안에는 어느새 제멋대로 배열된 음정들처럼 왁자지껄한 젊은이들로 가득 찼다. 지안이 전쟁터에라도 출장하는 장수인 양 자못 비장한 표정으로 내 쪽을 향해 몸을 약간 기울이면서 말했다.


"우리도 큰소리로 말해요. 쟤들한테 지지 말아요~"


잔잔한 호수에 순식간에 태풍이 몰아치는 것처럼 가끔씩 전투적으로 변하는 그녀를 나는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녀 안에 깊숙이 숨겨놓은 뜨거움들이 무심코 새어 나오는 순간이었다.


"제가 좀 낭만적이질 못하죠? 쓸데없는 데서 간혹 가다 투쟁성이 발현되거든요~ 젊은 애들하고 목소리로 경쟁이나 하려고 하고.. 이게 나이 든 증거일 거예요. 후훗"


"저도 그런 걸요~ 큭큭.. 그런데 지안씨는 어떤 걸 낭만적이라고 느끼나요?"


"야릇하게 모호하면서 몽환적이고 느긋한 그런 감성 상태에 도달하는 게 낭만적인 거 아닐까요? 아마 이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같이 이성적인 사람은 그런 감정 상태에 도달할 때 낭만적인 심성을 갖게 되는 거 같아서요.."


'낭만적 심성'에 대한 지안의 설명은 비교적 틀린 말은 아니었다. 수애가 욕망의 대상으로서 남자들을 대하는 방식에선 '누구나'와 잠자리를 하며 쾌락을 즐기는 밤이 낭만적인 것으로 둔갑할 때도 있었지만, 수애의 낭만적인 몸짓에는 어딘지 모르게 서글픈 구석이 있었다. 나는 문득 지안이 말한 것과 같은 낭만적 상태 속에서 그녀의 야릇한 숨길을 느끼고 싶어졌다.


"현우씨는 여자를 몇 번 만나야 그 여자가 지루해지나요? 아니 정확하게 몇 번 자야 그 여자가 지루하게 느껴지나요?"


지안의 엉뚱한 질문은 낭만의 외딴섬으로 떠내려간 나의 상상력을 명쾌하고 이성적인 눈빛의 지안 앞으로 다시 불러내었다. 도발적이고 당돌하기도 한 그녀의 질문들에 어느샌가 나는 스며들고 있는 것도 같았다. 나는 좀처럼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세미나에 참석한 패널처럼 대답했다.


"상대마다 다르겠죠. 어떤 상대는 단 한 번을 만나고도 즉시 지루해지기도 하고, 어떤 여자는 열 번을 만나도 점점 흥미가 더 생겨나기도 하고요. 대략적인 중간값을 원하신다면, 답변드리기가 곤란한 질문이네요. 사람과 이별을 할 때는 잠자리가 문제가 아니라, 다른 주변 상황이나 심리적 변화에 원인이 있기가 쉬워요."


어쩌면 지안은 나를 떠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수애와 섹스를 나누는 친밀한 사이라는 점을 지안이 의식해서 던진 질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대체로 남자들은 복잡하게 생각하는 여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여자를 만날 때 그냥 쾌락적이고 환각적이기를 기대한다. 수애는 정확하게 남자들의 보편적 욕구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남자들을 대한다면, 지안은 더럽게도 굵은 가시를 가지고 있는 축에 속할 수도 있다.


"지안씨는 연인 사이에 어떤 여자가 가장 최악의 여자라고 생각하세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상대를 이용하는 사람 아닐까요?"


"남자가 자신이 여자의 목적을 위해 이용당하고 있는 걸 안다면요. 남자들이 모두 바보는 아니거든요. 그건 최악이 아닐 거 같은데요.. 하하"


"현우씨가 생각하는 최악은 뭔데요?"


"최악의 여자는 남자에게 헛된 약속을 하면서 그녀의 쾌락을 연장하려는 여자이죠. '나는 당신 여자예요, 당신만을 사랑해요, 조금만 기다려줘요, 얼마 후면 내 주변을 정리하고 당신에게 갈게요.' 이런 거짓으로 남자를 기다리게 만드는 여자가 최악 아닐까요?"


"그게 남자를 쾌락의 도구로 이용하는 거잖아요~"


"아, 그런가요? 하하하~"


"그런데 현우씨에게 거짓된 약속을 하면서 현우씨를 기다리게 만든 여자가 있었나 보네요.. 큭큭"


물론 나를 그런 멍청이로 대접한 여자는 없었다. 나는 좋은 나무를 고르는 법을 알고 있듯이, 정직한 여자를 고르는 법을 이제 어느 정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 세상의 모든 여자는 사기꾼이다. 그렇다고 이 세상의 어떤 남자도 사기꾼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여자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기꾼의 기질을 가지고 태어나는 건 아니겠지만, 여자는 남자 품에서 여자가 되는 순간부터 사기꾼으로 비로소 다시 태어나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것은 남자보다 불리하게 태어난 여성의 생태적 본질에 기원한다.


지안은 매우 이성적이고 정의로운 심성을 가지고 있어서, 자칫 남자들에게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보이기 쉽다. 하지만 그건 하수들의 관점일 뿐이다. 지안의 언어는 현학적이지 않고 거추장스러운 데가 없어, 오히려 듣다 보면 쌉싸름하지만 꽤 달콤한 맛이 났다. 나는 그녀의 언어에 중독되어가고 있음을 알아챘지만, 그 달콤한 중독에서 결코 헤어 나오고 싶지 않았다. 나는 점잖은 신사이고 싶지 않았지만, 그 중독에 마비된 채로 그 밤에도 대학가의 어느 호텔에서 혼자 잠을 자고 다음날의 아침을 맞았다.


남자가 여자에게 마음이 한번 열리면, 그것은 영원히 닫을 수가 없게 되어버린다. 수애와 셋이서 함께 지안을 만났던 첫날의 어느 지점에서인가 이미 내 마음은 지안에게 열렸던 것 같다. 그날 나는 그것을 나의 관능적 욕구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여자를 갖고 싶은 욕망만으로 지안에 대한 내 심리적 상태를 설명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점점 깨닫게 되었다. 서울로 돌아와서도 나는 무작정 그녀가 보고 싶고 그녀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 나이에 여자 때문에 초조하게 들떠있다니, 나답지 않군~' 나는 짐짓 나를 다독여보기도 하였지만 허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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