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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Jun 22. 2023

(소설) 계절이 바뀌는 길 9

아무 목적도 원하는 바도 없이 자유롭고 쾌활한 그녀의 웃음소리가 끝나는 지점에서, 불현듯 나는 내 이름 석 자를 다시 기억해 내고야 말았다. 젊어서 한창 사업을 일굴 때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입에 내 이름을 달고 살았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사업이 궤도에 오르면서 나는 더 이상 내 이름을 팔고 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조금 어색한 것도 같네요. 언제부턴가 내 이름을 그대로 들어보지 못한 것도 같군요."


나의 엉성한 대답에 오대빵 그녀는 선한 눈빛으로 다정하게 말했다.


"흐흐흐~ 남자들은 서로를 부를 때 사회적 포지션을 더 자주 사용하기도 하더라고요. 강부장, 최선수, 사장, 황회장 등등~ 그게 말이죠, 자신이 아직 현직에 있다, 나는 은퇴한 무직자가 아니다, 이런 걸 증명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고, 나는 한 자리하는 사람이요, 라고 으스대는 걸로 보이기도 하고요.. 현우씨도 저더러 '쌤'이라고 부르지 말고 그냥 '지안씨'라고 부르는 게 어떨까요? 제가 이름 부르는 걸 선호하는 편이라서요."


이렇게 훅훅 들어오는 직선적인 그녀의 화법은 그녀 또래에서는 볼 수 없는 방식이었다. 대부분 그 또래의 여자들은 상대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의미로 자기 의견을 명확하게 내비치지 않았다. 명문대 교수직에 있는 내 여사친들도 그러했고, 시대를 앞서간다고 나름 생각하는 전문직 여성들도 비슷한 양상이었다.


여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남녀 관계로 발전시키는 것에 관해선 삼십 대 이후로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나였지만,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화법을 가진 여성은 드물었다. 게다가 지안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그냥 예쁘기까지 하여서, 나는 그녀 앞에서 평소의 기술이 무용지물이 되는 건 아닐까 불안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면 현우씨가 가장 많이 듣는 호칭은 뭔가요? 백사장 그런 거 말고요."


지안은 고요한 눈빛 속에 진심 어린 호기심을 담아 사람들을 그녀의 방식대로 이끌어가는 재주가 있어 보였다. 나는 순간 약간 당황한 나머지 중학생처럼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제가 차(茶)와 요트 모임을 두 개 하고 있는데요, 거기에선 저를 '엣지 현'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엣지 현'이라는 닉네임이 우스꽝스럽게 들렸는지, 그녀가 큰 소리로 활짝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얼마나 엣지가 있으시길래, 호칭에 '엣지'라는 말까지 넣어 부를까요? 큭큭~"


나는 공격할 타이밍을 아는 놈이다. 목적을 잊지 말고 이번엔 밀고 나가야 한다.


"제 삶이 다 그래요. 낮이건 밤이건 다 엣지가 있죠. 특히 예쁜 여자 앞에선 더욱 엣지가 있고요."


이 정도의 공격이면 대부분의 여자들은 고개를 숙이거나 앞에 놓인 잔을 만지작거리며 나의 뜨거운 시선을 회피하기 마련이다.


"와아~ 밤에도 엣지가 있다는 건, 너무 잘난 체하는 거 아닐까요? 내가 당장 확인해 볼 수도 없고, 참 궁금하긴 하네요. 흐흐흐~"


지안은 내 두 눈을 피하기는커녕 입가에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로 장난스럽게 바라보며 대꾸하였다. 나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치는 기술이라니, 이 여자는 내 공식에 없는 여자 스타일이었다.


이것이 남자와 여자가 단 둘이 처음 만나 나눌 수 있는 대화라는 게 사실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녀의 싱글거리는 눈동자를 끝까지 마주하지 못하고 이내 막걸리잔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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