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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Jun 21. 2023

(소설) 계절이 바뀌는 길 8

물론 나도 오대빵의 표현에 등장한 남성들처럼 진수애의 '멍청한 추종자'들과 다를 바가 없던 시간이 있었다. 그것은 진수애가 대단히 아름다워서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단박에 품에 안고 싶을 만큼 수애가 섹시한 여자로 느껴졌기 때문도 아니었다.


수애의 외모는 지극히 평범하기 이를 데 없어서, 수애가 자신의 포지션을 떠벌리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사람들의 눈에 어떠한 인상도 남길 수 없을 만큼 허무한 외모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지만 진수애는 남자들의 허황된 욕망의 지점을 간파하고 있는 것만은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었다. 세상의 수많은 남자들이 예술가와 교수라는 직업군을 동경하고 있다는 것을 수애는 꿰뚫어 보았던 것 같다. 진수애는 전 남편과 아트센터 관장이 만들어놓은 무대를 마음껏 누비고 다니며 행세할 줄 아는 여자였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도 자신을 성적으로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진수애가 어느 시점에 깨닫게 되었을지는 모를 일이다. 진수애 나이 십 대 아니면 이십 대였을지, 혹은 유럽 유학길에 자신에 대해서 알게 되었을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진수애가 사십 세에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사정이 달랐다.


진수애의 전 남편은 석사를 마친 교육과학기술부의 고위직 공무원이었다고 한다. 그 남자는 자신의 위치와 능력을 통해 지역의 어느 아트센터 관장과 모종의 거래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이언스 아트 센터 관장은 수애의 전 남편이 써 준 논문으로 지역의 촌발 날리는 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따냈고, 그 박사증으로 또 다른 촌발 날리는 대학에서 시간 강의를 하며 자신의 사업에 유리하게 작용되도록 연결시키고 있었다.


수완이 좋은 아트 센터 관장은 진수애의 남편이 써준 박사 논문의 대가로, 자신이 가진 온갖 인맥을 동원하여 진수애를 어느 시골 구석에 있는 대학교에 교양학부 교수로 밀어주었던 것 같다. 진수애는 나와 술을 먹던 어느 날, 전 남편과 아트센터 관장에 관해 언급하면서도 전 남편과 어떠한 사유로 이혼했는지는 끝내 함구하였다.


나는 그들의 이혼 사유가 궁금하지도 않았다. 진수애는 전 남편에 대해서는 비교적 우호적인 감정을 가지고 말을 이어갔지만, 자신이 귀국한 뒤 가졌던 전시회를 아트 센터에서 너무 조촐하게 치른 것에 대해서는 언성을 높이며 짜증을 냈었다.


오대빵 그녀가 나를 '멍청한 추종자'와 별개로 '신랄한 비판가'로 분류한 것은 어떤 면에선 맞지 않았다. 나 역시 진수애의 천박한 유혹에 넘어가버린 속물이었다.


진수애는 처음 만나는 사람들을 상대로 1단계에서 '유학파 조각하는 예술가 교수'라는 허울 좋은 타이틀로 덫을 쳐놓고 사람들에게 싸구려 환상을 심어놓는다. 그 1단계에서 진수애의 언어를 주의 깊게 들어본다면, 분별 있는 사람은 수애의 면면을 파악하기가 그리 어려운 일만도 아닐 수 있다.


그리고 술이 어느 정도 올라간 상태로 이동하는 2단계에서 진수애는 자신이 가진 고작 몇 개 안 되는 모든 재주를 최선을 다해 펼쳐 보이곤 하는데, 그것을 두 번 본 사람이라면 진수애를 불쌍한 여자로 여길 것이 틀림없다. 수애의 신음소리인지 콧소리인지 분별하기 어려운 노랫소리는 언제나 딱 두 곡에서 끝이 나기 일쑤인데, 함께 있는 타인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느새 수애의 몸은 앉아있던 남자들의 다리 위로 올라가 있는 것이다.


수애와 처음 잠을 잔 다음 날 아침, 나는 침대에서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다정했던 것 같다. 내가 사랑이라고 믿었던 전 아내와 처음 잠을 잤던 날도 나는 다정했었다. 아내와 이혼하고 적지 않은 여자들과 잠자리를 하면서도 나는 보편적으로 다정한 남자였다.


그것은 다정한 남자 행세가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사랑'을 찬양하고, 나와 사랑을 나누는 여자들과의 인연을 귀하게 여기며 존중하는 마음가짐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섹스와 사랑이 다른 건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수애가 내 품에 안겼던 여자들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수애와의 두 번째 잠자리에서였다. 그때 문득 떠오른 단어는 작업에 많이 사용되는 '에폭시'였다. 수애는 어찌 보면 정상적인 정신의 소유자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었다. 이후로 나는 수애를 먼저 찾지는 않았지만, 작품에 쓰일 좋은 나무를 볼 때마다 수애가 떠올랐다. 내가 왜 수애를 끊지 못하고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것인지, 그것에 대해 가끔 골몰할 때도 있었다.


한 사람을 떠올릴 때마다 미묘하게 불쾌하고 석연치 않은 감정에 사로잡힐 수도 있다는 걸, 나는 진수애를 통해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내가 진득거리는 생각의 늪에서 마지막 발목을 빼내고 있을 때, 내 앞에 앉아있는 오대빵 그녀가 유쾌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런데 현우씨를 제가 현우씨라고 부르는 게 어색한 건 아니죠? 가끔 사람들은 나이를 '호칭'에서 먼저 먹고 들어가기도 하잖아요. 젊거나 늙었거나 이름을 부르는 게 좋은 거 아닐까요? 하하~"


그러고 보니 오대빵 그녀는 나를 본 처음부터 스스럼없이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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