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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Jul 02. 2023

(소설) 계절이 바뀌는 길 13

트루스비치는 사방이 검게 칠해진 광활한 밤의 항아리 속에 갇혀있는 우리들만의 세계였다. 저 멀리 끝도 없을 것만 같은 검은 허공의 평면 어디쯤엔가 수평선이 있을 것이라고 달빛은 이야기하는 듯하였다.


달빛 아래 야릇하게 한들거리며 춤을 추는 수애의 몸짓엔 어딘가 모르게 굶주린 느낌이 들기도 하였다. 나 역시 수애와 다를 바 없는 또 하나의 아귀일 수도 있겠지만, 인간계를 떠돌며 더러운 것이라도 좋으니 뭐라도 주워 먹으려는 아귀의 죄스러운 허기를 닮은 듯도 한 수애의 몸짓에 불현듯 불쾌감인지 환멸인지 알 수 없는 감정밀려왔다.


흐느적거리는 수애의 팔을 맨 처음 잡아 준 놈은 역시나 환규였다. 누군가를 향해 피어나고 싶은 간절한 열망이라고 보기엔 수애의 느리게 흔들거리는 몸은 주체할 수 없이 가벼웠고 다소 촌스러운 구석이 있었지만, 트루스비치의 밤과 아주 어울리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수애와 춤을 추고 돌아온 환규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파라솔 테이블 위에 놓인 맥주를 집어 들며 벌컥 마셨다. 수애의 몸은 그새 승찬의 몸과 밀착된 채로 검은 바닷가에서 하나의 형체로 흔들리고 있었다.


"요즘 해외 나가서 돈 버는 티브이 예능프로그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들 하나?"


유월 밤바다에 부는 바람은 생각만큼 자비롭지가 않아서 하나둘씩 화롯가 주변으로 모여들자, 환규가 조금 진정된 얼굴로 모두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윤식당, 천사장 등 아주 재밌던 걸요~ 돈이야 얼마나 벌겠어요, 시청률 높이느라 해외에서 쓰는 돈이 더 많겠지만, 저는 그런 프로들 좋다고 봐요. 자본주의에선 트렌드를 먼저 읽고 움직이는 거잖아요~"


송여진이 매우 지성적인 표정을 지어 보이며 진지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천사장, 그놈이 대단한 놈이란 말이지. '걸레'로 소문이 자자했던 마누라를 데리고 살면서 매일 아침밥을 차려주는 정성이라니~ 나 그 사람 인정하네, 아주 대단한 사내야. 그런 놈이 진짜 사내지, 안 그런가?"


술에 취하면 대화 중에 이따금 비속어를 거침없이 섞어 는 기준의 의견에, 여진이 어딘가 불편기색으로 대꾸했다.


"남자들은 참 이상하네요. 천사장 와이프의 처녀 적 행실이 어땠든지 간에 지금은 두 아이의 엄마로서 성실하게 잘 살고 있잖아요. 남자가 수많은 여자들과 연애를 하면 '능력자'니 '카사노바'니 칭송하며 영웅 대하듯 부러워하면서, 여자가 남자들과 연애를 많이 하면 '걸레'로 표현하는 건 너무 비겁하지 않은가요? 저기 바닷가에 있는 여자가 아까 기준씨가 말한 '걸레짓'을 하고 다닌다고 가정해 볼까요~ 유럽 유학파 아티스트며 교수라고 하면 저 여자더러 '걸레'라고 표현할 수 있나요? 앞뒤가 안 맞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닌 셈이잖아요. 다들 말씀 좀 해보시죠."


여진의 지적은 달과 지구의 거리를 계산하는 것만큼이나 매우 정당했다. 나는 한 번도 수애의 행실에 관해서 '걸레'라는 표현을 마음에 담아본 적이 없었다. 나와 잠자리를 하고도 이튿날이면 또 다른 남자와 쾌락을 즐기기도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수애의 자유의지라고만 치부할 따름이었다. 수애는 해외 유학생활을 오래 했고 게다가 교수라는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이니까 말이다.


십 년 전 이혼하고 혼자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호감이 느껴지는 여자를 만나게 되면 구태여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나는 여인과 둘만의 은밀한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하지만 수애처럼 동시에 여러 사람을 만나며 섹스를 갈구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대부분 여자들은 내가 건네는 호감의 표시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수애는 내가 먼저 호감을 가졌던 여자도 아니었다.


수애는 자신을 그럴싸하포장해서 남자들의 허영스러운 호기심을 자극하는 법을 교묘하게 터득한 재주를 가졌을 뿐이지만, 나와 잠자리를 했다는 이유로 수애는 어느새 내 안에서 미화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걸레를 상대하는 남자는 아니다' 이런 뒤틀린 자기애가 수애를 속칭 '걸레'의 대열에서 제외시키고 있었을 것이다.


검은 어둠 속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승찬은 오래도록 수애와 모래사장 위를 맴돌았다. 멀리서 그들을 바라보는 준석의 눈빛을 좇는 여진의 두 눈 달빛 아래 서늘하게 번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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