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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Jul 10. 2023

(소설) 계절이 바뀌는 길 14

나는 그날 밤 트루스비치에서 기타를 연주하지도 춤을 추지도 않았다. 그 밤의 달빛은 놀랍게도 오래전부터 잊고 지냈던 고독감으로 나를 인도하고 있었다.


몇 해 전 차례차례 구순에 돌아가신 부모님의 자애로웠던 얼굴들과, 각자의 수도원에서 수녀로 일생을 살아가고 있는 두 명의 누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늘 무엇엔가 골몰해 있는 사람처럼 보이다가도, 아무렇지 않은 일에도 처음 보는 광경인 것처럼 신기해하기가 일쑤인 지안의 얼굴도 떠올랐다.


쾌락이라는 선물 상자를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거나 앞으로도 받지 못한 채로 살아갈지도 모르는 그들은 비교적 순박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의 소소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얼마 전 지안이 문득 나를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이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놀자님은 언제부터 놀았나요? 중학생 때부터, 아니면 고등학생 때부터?"


그날 지안이 나를 향해 불러준 '놀자님'이라는 호칭이 꽤 재밌기도 하면서도 그녀의 우스운 질문이 매우 맘에 들었던 나는, 흡사 내 인생 전부를 만족해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었다.


"초등학생 때부터였을 걸요~ 아니 그전부터 매일 잘 놀았던 것 같기도 하고~"


어릴 적에는 누이들의 질투와 시샘도 받으며 자랐지만, 내가 어디에서나 잘 노는 아이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네 명의 누이들의 따뜻한 애정과 돌봄이 던 것만은 사실이다.


트루스비치의 달빛은 어느새 자전거를 타고 성당으로 향하는 어린 소년에 대한 기억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해가 일찍 뜨는 여름에는 상관이 없지만, 겨울철 새벽 미사 전례에 가는 건 여간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얀 눈에 덮여 있는 세상 속에 십자 모양으로 높이 솟아 있는 성당의 첨탑을 바라볼 때마다, 어린 소년의 가슴은 매번 터무니없이 웅장해지곤 했었다.


신자들의 숫자가 줄어든 탓도 있는 데다가 남녀평등의 개념이 확장된 덕분으로 요즘은 여학생들도 제대(祭臺) 위에 올라가 복사(服事)를 설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가톨릭의 전통은 남자들만이 미사 전례 중에 신부님의 시중을 들 수 있었다.


수년간 복사 생활을 하면서 장차 사제가 되기로 굳게 마음을 먹은 적있었던 것 같은데, 아마 부모님의 반대로 그 꿈은 좌절되었던 성싶다. 아니 어쩌면 그건 나의 유약함을 변호하기 위한 핑계였을 수도 겠지만, 내가 원했던 사제의 길을 더 완강하게 반대하신 분은 삼대독자셨던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사대 독자인 내가 좋은 아내를 만나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살기를 기필코 바랐다. 하지만 결국 어머니는 아들이 이혼해서 혼자 사는 모습을 안타깝게 여기다가 돌아가셨다. 한 때 거룩한 사제의 길을 흠모한 적이 있던 사내는, 지금은 악마의 유혹에 넘어간 파우스트 꼴을 하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만도 없다.


트루스비치의 밤이 지나가고 며칠 뒤 기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진수애 그 여자 정체가 뭐야? 너는 이미 알고 있던 거지? 그 여자 세계선수권대회 출신이 분명해~ 아니면 어디 갇혀서 훈련을 모질게 받지 않고서야 저럴 순 없지.. 그런 여자는 난생처음 본다."


기준은 부당한 서비스를 받은 고객이 고객만족센터에 전화를 걸어 항의라도 하는 것처럼, 수애에 관한 험담인지 불평인지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을 쏟아내었다. 그것은 얼핏 듣기에 자칫 수애의 뛰어난 능력을 찬양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였다.


신발 밑에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 않는 낙엽 같은 한 여자에 대한 생각으로, 기준은 자신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호기심과 욕망의 불분명한 경계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내가 지금 기준에 대해 느끼는 생각들을 지안은 나를 보며 느꼈을지도 모른다.


나는 죽을 때 인생을 뒤돌아보며, 나와 연애를 했던 여자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그런 말을 하자, 지안은 고요하고 다정한 눈빛으로 이렇게 대꾸했었다.


"글쎄요, 과연 그것이 사랑을 나눈 모든 여인들에 대한 감사의 차원일까요? 혹은 스스로의 인생에 대한 예의인 걸까요? 놀자님 인생이니 좋을 대로 하세요. 흐흐~"


지나고 보면 지안과 나눈 대화들은 가끔 달나라에서나 나눌 법한 이상한 이야기가 섞여 있기도 했다. 내가 욕망하는 여자 앞에서 왜 그런 말들을 서슴지 않고 내뱉을 수 있었는지 참으로 수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안이 여느 여자들과 다르게 사고한다고 해서 그녀가 여성적 심성을 하나도 소유하지 않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의 교제는 일반적인 남자와 여자의 관계 맺기 방식과는 너무 거리가 멀어져 가고 있다는 생각에 나는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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