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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Jul 14. 2023

(소설) 계절이 바뀌는 길 15

사업을 하다 보면 막다른 절벽 위에 혼자 서있는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오직 나의 결정에 의해 투자의 승패가 갈리기도 해서, 최종 결정을 해야 할 때마다 나는 알 수 없는 불안과 고독한 싸움을 치러야만 했다. 그것은 자본을 잃을 수도 있다는 불안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나, 지금 내가 지안에게 느끼는 이 불안감은 그것과는 또 다른 감정이었다. 영원히 잃고 싶지 않은 사람에 대한 불안이었다. 지구상에 나를 아는 단 한 사람은 지안일 것도 같았다. 나는 무턱대고 지안에게 문자를 보냈다.


<바빠님, 뭐해요? 오늘도 바쁜가요?>


지안이 나를 '놀자님'이라고 불러준 것에 대한 호의적인 답례로서, 나는 그녀를 '바빠님'으로 부르게 되었다.


<지금은 부모님 모시고 산책 중이에요. 이따가 연락드릴게요~>


지안의 답장은 언제나 간결했다.


<앗, 잠깐만요. 오늘 저녁에 시간 어때요? 내가 갈게요.>


<네, 좋아요. 오후 5시 이후 가능해요.>


지안의 문자를 보고 나는 그대로 사무실을 나와 대전으로 향했다. 그녀의 앞날에도 레드카펫 같은 길이 열리기를 기원하며 얼마 전 그녀를 내려준 공원 앞에 차를 세웠다. 자주 어울리는 동네 친구처럼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며 지안이 내 차에 올라탔다.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


"우리 한 달 만에 보는 거예요. 잘 지냈을 리가 없죠. 못 본 사이 더 이뻐졌네요."


이뻐졌다는 말에 지안이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도 입꼬리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후훗~ 상투적이시긴.. 마쳐야 할 일을 다 끝내서 그럴지도요~"


우리가 만나지 못했던 동안 지안은 남편과의 이혼 소송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지안에게 이혼이 어떤 의미일지 가늠할 수가 없었지만, 어떤 식으로든 내게 긍정적인 기회가 오리라는 건 확실했다.


"그럼 축하 파티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골치 아픈 일을 끝내면, 형식적으로나마 축하 파티 같은 거 하고 그러는 거라던데~"


"그런가요? 파티는 모름지기 여럿이 해야 재미있잖아요, 파티광 수애씨에게 연락 한 번 해볼까요?"


그러고 보면 지안과 내가 공통으로 아는 사람은 진수애 한 명뿐이었다. 영종도에서 헤어진 후 수애와는 이제 만날 일이 거의 없었다. 수애는 제재소를 운영하는 준석과 직접 연락해서 작업에 쓸 목재를 구하기로 했다. 지안 앞에서 수애를 배제시킬 필요조차 더 이상 내겐 없었다.


강렬한 태양빛이 사그라든 저녁 시간이었다. 진수애는 모든 낮과 밤들이 무색하리만큼 하나도 변하지 않은 목소리로 요란스럽게 우리 자리에 합석했다. 옅은 갈색빛이 감도는 색안경 너머로 수애의 알듯 모를 듯한 미묘한 표정이 나와 지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대표님과 지안씨니까 말하는 건데요, 나 교수질 그만하고 다시 유럽 가요."


수애의 말에 따르자면, 유럽에 있는 작가 친구들이 거기에서 함께 지내며 작업하자고 초대를 해와서 그 제안을 수락했노라고 했다. 하지만 수애의 돌연한 유럽행은 자발적인 교수직 사퇴에 의해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엄연히 해임에 가까웠다. 아무리 중소도시의 변두리 삼류 대학이라고는 해도, 사람 사는 곳에 말(語)들은 오고 가기 마련이다.


수애와 잠을 잤을 게 분명한 기준과 승찬은 서로가 모르게 나에게 수애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다. 그 둘은 수애의 신변에도 관심이 있었는지, 수애의 대학교 괴담까지 다 전해 듣고 있었다. 학교 측에서 수애의 권고사직 결정을 한 발단은 이러했다고 한다.


어느 날 수애가 대학가 근처에서 동료 교수들과 회식을 하고, 다시 대학교 내에 있는 교수 기숙사로 이동할 때였다. 택시에서 술에 취한 수애가 남자 교수에게 성적인 농담과 욕설과 스킨십을 하며 덤벼드는 모습을 본 택시 기사가 그날은 '저분이 만취했구나' 생각하며 넘겨버렸다고 한다. 그때 당황해했던 남자 교수는 그 일이 있은 뒤 얼마 후에 교수직을 사임하고 그의 아내가 있는 도시로 영영 자취를 감추었단다.


그런데 몇 달 뒤 하필이면 수애는 또 그 택시를 타고 교수 기숙사로 향하게 되었다. 역시나 그날도 수애는 만취 상태였고, 이번엔 지난번 남자 교수와는 다르게 머리숱이 풍성하고 조금 더 젊은 남자가 같은 택시에 동승했었다. 그 젊은 남자도 술에 많이 취했었는지, 그날 택시 안에서 수애와 남자는 조금 지나친 말과 행동들을 저질렀던가 보다. 택시 기사는 수애를 알아봤고, 여자의 이름은 몰라도 영어를 섞어 써는 특유의 끈적이는 말투와 생김새를 설명하는 건 매우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대학교 측에서 진수애를 특정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전혀 엉뚱한 분야의 교수가 따낸 국가지원 연구비가 진수애의 작품 활동에 지출된 흔적도 밝혀졌다고 했다. 


그날은 지안의 소송 마무리를 축하하는 자리가 아니라, 수애의 적반하장 격인 주사(酒邪)를 들어주는 자리가 되어버렸다.


"이래서 여기가 촌스러운 거야. 아티스트가 작품만 잘 만들면 되는 거 아니야? 나 진수애를 이렇게 몰라주다니~ 안 그래요, 대표님? 정치가가 정치만 잘하면 되는 거지, 스캔들 따위가 뭐 중요해요~"


수애의 푸념을 듣다가 지안이 묵직하게 입을 열었다.


"아티스트와 정치가는 다르죠. 아티스트는 구태여 사람들의 동의를 구할 필요가 없지만, 정치가는 사람들의 동의를 구해야 하는 거잖아요. 정치가의 도덕성을 우리가 따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거 아닐까요? 가르치는 사람 역시 신뢰할만한 삶을 살아가는 게 때론 매우 중요할 수 있어요. 각자의 욕망대로 살아가는 게 민주주의라고 말하면 안 될 거 같아요."


지안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수애는 알 수 없는 눈웃음을 지으며 소주잔을 들었다. 지안은 막걸리를 마시고, 나도 지안의 손에 든 것과 같은 누런 색의 막걸리 잔을 들이켰다. 주방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곳에서 전을 부치는 음식점 여주인의 손길이 우리들의 술잔보다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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