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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Jul 19. 2023

(소설) 계절이 바뀌는 길 16

일전에 어느 술자리에서인가 수애는 지역구 공천에 관한 이야기를 언뜻 내비친 적이 있었다. 아무리 정치할 만한 사람이 없는 게 현실이라 할지라도, 단언컨대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진수애라는 인물을 정치인으로서 단 한 번도 떠올려본 적이 없다는 표정들을 지어 보였다.


순식간에 사람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다양한 부류의 남자들과 잠자리를 가졌다는 것을 빌미로 하여 그들의 권력마저 자신의 것으로 이해하는 수애의 조금은 나쁜 머리를 사람들은 그저 말없이 웃어넘길 뿐이었다.


정치가 갖는 만민 평등의 권위성마저 자신의 졸렬한 색기로 집어삼킬 수 있을 거라고 해석하는 수애의 텅 빈 머리 위에는 그날도 예술가의 표상인 양 모자 하나가 얹어 있었다. 그 모자는 수애 자신의 인생뿐 아니라 타인들의 인생마저 하찮게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느닷없이 도둑맞은 사람들처럼 한순간 모두가 넋이 나갔지만,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수애에게 "정치는 결코 당신 같은 사람이 함부로 넘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들의 나라와 정치를 욕보이지 말라"라고 따끔하게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날 집에 돌아와서 무엇 때문인지 속이 더부룩해서 약을 찾아 먹었던 기억이 난다.


상가의 불빛들이 즐비한 거리 위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있는 나무들의 잎사귀에도 서서히 어둠이 스며들었다. 깊어져가는 어둠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향하여 적당한 평화와 휴식으로 들어갈 것을 권유하는 것 같았다. 밤이 주는 평안과 위로의 세계로 인도되지 못한 영혼들이 불빛 사이로 흔들거리며 걸어 다녔다.


지안이 들기름에 노릇하게 구워진 두부구이를 집어 들다가 뭔가 생각난 듯이 이어 말했다.


"수애씨 유럽 가는 건 다행이에요. 수애씨가 우리나라의 정치를 많이 걱정하는 것 같은데요, 이 나라의 정치는 정직하게 일하는 국민들과 정치인들에게 맡기고, 수애씬 너무 자주는 말고 가끔 예술가로서 깊이 고뇌도 하면서 수애씨만의 달콤한 인생을 즐기며 사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각자 자기가 잘하는 일을 하는 게 진짜 정치의 본질 아닐까요? 이 집 두부 지~인짜 맛있네요~"


식당 안쪽에 가득한 불빛 아래로 지안의 언어들이 반짝거렸다. 그 집 주인장이 매일 새벽 직접 만든다는 두부에 수애는 몇 번 팔을 뻗는 것도 같았으나, 그래봐야 두부 세 첨도 들지 않은 채 소주 두 병을 다 마셔버렸다. 그날 저녁에도 수애는 노래방을 고집했지만 우리는 노래방에 가지 않고 다른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수애는 지안을 향해있는 나의 마음을 눈치채고 있는 것 같았다. 이차로 옮겨간 술집에서 수애가 이상야릇한 콧소리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나서 얼마가 흐른 뒤에 수애는 술집 앞에 도착한 검은색의 차를 타고 사라졌다.


수애가 나가고 지안은 별다를 거 없다는 듯이 시큰둥하게 내게 말을 걸었다.


"다른 남자 차를 타고 떠나가는 전 파트너의 뒷모습이라~ 얼마나 마음이 후우~려~언(?)할까 짐작도 안 되네요. 음음.. 자, 아무 의미 없는 우리의 인생을 위하여 건배~~"


지안이 안쓰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나를 놀리는 듯한 말을 내뱉아도 나는 기분이 언짢거나 다운되지 않았다. 나는 마주 앉은 지안에게로 상체를 구부려 그녀의 얼굴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이제 우리 오늘부터 진짜 1일 합시다~ 고전적인 방법이지만, 지안씨 향해 가는 발걸음은 절차대로 갈게요. 당신은 그냥 내가 당신을 마음껏 사랑하도록 허락만 해주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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