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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Jul 26. 2023

(소설) 계절이 바뀌는 길 17

지안은 이제껏 본 적 없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당혹스러워한 나머지, 맥주잔을 잡으려다가 얼음이 몇 개 떠있는 물컵을 엎질렀다. 내가 물이 번진 테이블을 닦는 짧은 시간 동안, 지안은 맥주잔을 벌컥 들이켜고 나서 말했다.


"미안해요, 현우씨~ 나는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나를 거절하는 건가요?"


"현우씨와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걸 나는 알아요. 하지만 지금은 어느 누구와도 새로운 남녀 관계로 엮이고 싶지 않아요. 이제 진짜로 내 인생을 살아보려고 하는데, 현우씨라는 또 한 명의 남자가 내 인생에 들어온다고 생각하니까 다시 갑갑한 기분이 들었어요."


나는 지안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지만, 어느 부분에선 석연치 않은 데가 있는 것도 같았다.


"지안씨를 갑갑하게 만드는데 혹시 거기에 진교수도 들어있나요?"


지안은 내 말을 재빨리 되받아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지안씬 한 번도 말한 적 없지만, 내가 진교수와 잠자리를 했던 걸 알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지안씨를 만나면서 늘 그게 걸렸어요."


가슴에 커다란 한숨을 억누르고 나를 바라보는 지안의 눈빛에는 측은함이 배어있었다.


"부인하지 않을게요. 우리가 수애씨를 통해 만난 사이가 아니었더라면 참 좋았겠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도 있으니까요. 마음에 1도 거짓이 없는 그런 삶을 살고 싶어서 이혼한 건데, 다시 내 마음에 어떤 거짓을 두고 남자와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건 싫어요."


술집 유리창 너머로 불빛들이 번쩍이는 간판을 따라, 방금 전 다른 남자의 차를 타고 떠난 수애의 형체 없는 얼굴이 떠돌았다. 적지 않은 여자들을 만나봤기에, 나는 지안을 붙잡아야 하는 이유가 더욱 분명했다. 가식이나 의도 따위를 매우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지안에게 다가서는 방법은 오직 그때마다의 진심뿐이었다. 나는 나의 진심을 초라하지 않게 전달하고 싶었다.


"당신은 물론 지나치게 매력적이지만, 나는 지안씨를 여자로서만 바라보고 좋아하는 게 아녜요. 당신을 깊이 존경하고 좋아해요. 저의 차 스승님 외에 여자를 존경하는 건 지안씨가 처음이에요. 존경하는 여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다시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당신이 이렇게 내 앞에 나타난 거예요."  


"나도 내가 이럴 줄 몰랐어요. 현우씨와 농담을 섞어가며 무슨 대화를 해도 재밌었는데, 그건 친구일 때의 감정이었나 봐요. 사람은 특별한 감정 없이도 누구와도 잘 수 있는 자연계 생물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내 연인이 되려는 남자에게만큼은 쿨하게 적용을 못 시키겠네요. 흐흐흐~"


지안은 어두운 거리에 매달려 있는 불빛들을 그녀의 내면으로 가져가서 비추고 있었다. 지안을 만나게 해 준 진수애가 고마운 건지 미운 건지 알 수 없는 감정들이 깊은 산에 걸려있는 운무처럼 내 가슴속에서 피어올랐다.


아무 생각 없이 나의 욕망대로 여자와 밤을 보냈던 지나간 나의 시간들에 대하여, 나는 처음으로 그 시간의 의미에 관하여 떠올려 보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아직 젊었으며 건강했고 꽤 멋진 놈이었다. 나를 욕망하는 여자들의 뜨거운 욕정을 채워주는 것에는 어떠한 계산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밤들과 그 욕망들의 어딘가에 문제점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의구심에 사로잡히고야 말았다. 지안을 먼저 택시에 태워 보내고, 나는 불빛과 별빛 사이를 가로질러 흔들리며 호텔로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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