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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Jul 27. 2023

(소설) 계절이 바뀌는 길 18(최종회)

어쩌면 나는 며칠 동안 어느 정도 비참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를 거절한 여자가 지안이 처음이라서 비참했던 것은 아니었다. 연인 관계로 진입하는 것은 거절당했지만, 지안은 언제나 좋은 친구였고 의젓한 인생의 선배 같은 느낌으로 나를 변함없이 대해주었다. 그런데도 량 맞은 기분에서 벗어나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마도 그런 감정들 속에 빠져들었던 것은 내 거짓과 허영에 대한 목도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 지안은 그날 밤 읊조리듯이 이렇게 말했다.


"권선징악 같은 건 다 허상일 뿐이죠. 고결한 노처녀가 선한 것이라고 말할 순 없겠지만, 자신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 상대의 욕망을 이용하는 건 결코 선하다고 볼 순 없는 거잖아요. 그 선하지 않음에 동조하는 남자들의 성욕에 무한한 연민을 금할 수가 없군요.."


차분하게 그 말들을 내뱉을 때 지안은 몹시 화가 났던 건지도 모른다. 그녀의 단정하게 다듬어진 언어 속에는 남자들의 무절제한 욕망을 향한 조소가 담겨있었던 것도 같다.


세상은 그렇게 뒤숭숭한 욕망들이 서로 얽히고설켜서 그들만의 거미줄형성하고, 그 거미줄은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땅을 집어삼킨 뒤 그 땅 위에 그들만의 호화로운 저택을 짓고 살아가도록 허용한다. 그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비열한 수고를 환락으로 위로받으려 하는데, 나 역시 사업과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 침묵으로 그들에게 동조한 적도 있었다. 모든 침묵은 동조일 뿐이라고, 그날 맥주가 엎질러진 테이블에서 지안은 간결하게 정리했었다.


"당신이 말하는 '엣지'가 허영이라고 느껴질 때 연락 주세요. 그때가 현우씨의 계절이 바뀌는 길목일 테니까요."


나의 '엣지론'에 대한 지안의 일침은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모든 허영과 거짓된 마음들을 덮어두었던 채반을 순식간들추어버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나의 약점이 들켜버렸다고 해서 알량한 내 자존심이 구겨졌다거나 변명하고 싶은 구차한 마음들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진수애가 어쭙잖은 외모로 아직도 남자들에게 유효한 건, 남자들 안에 웅크리고 있는 거짓과 허영을 교묘하게 색욕으로 버무릴 줄 알기 때문이었다.  


그날 지안의 이혼 소송이 매듭지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던 날, 나는 강줄기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나무로 만든 집부터 지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투자한 회사가 상장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해도 그녀의 이혼 소식만큼 벅찬 기쁨을 안겨줄 것 같지 않은 그런 날이었다. 아, 물론 내가 투자한 회사는 아직도 염료 개발 단계일 뿐이라서, 상장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 투자한 회사가 개발에 성공해서 상장이 되고 내가 돈방석에 앉는다 한들, 진정한 나의 사람이 없다면 더 쓸쓸해질 건 자명한 다.


어느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떠올리며 혼잣말로 묻는 장면이 있었다. 편안함에 이르렀냐고. 지안은 그런 뜻을 가진 이름이었다. 그 이름은 비구니의 법명으로 더 잘 어울릴 법하다고 그때 문득 생각했었다.


살아온 날들이 그 사람의 인품을 증명하는 것과도 같이, 내가 흠모하는 지안의 인품은 어느 수도승 못지않게 빼어났다. 나는 그녀가 왜 이혼을 결심하고 드디어 실행에 옮겼는지 묻지 않았었다. 지안이 결정을 내린 에는 뭐든지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내가 그토록 존경하고 좋아하는 그녀는 나와 연인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며칠간 나는 온통 그 하나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내 인생의 후반전은 지안과 함께'라는 단순한 명제 하나가 속칭 '지역구 화류계'를 평정던 카사노바 오빠 명찰을 미련 없이 버리도록 만들었다. 어차피 나이 든 남자에게 필요한 사람은 마음 잘 맞고 몸 얼추 맞는 여자 하나면 충분하다. 게다가 진짜 엣지있는 인생은 적절한 도덕성과 무관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불길한(?) 예감마저 들기 시작했다.


이윽고 나의 계절이 바뀔 때가 되었나 보다. 인생의 계절은 세월에서 오고 가는 게 아니었다. 사람을 통해 오고 가는 인생의 계절이라면, 엣지도 버리고 명찰도 버린 나는 계절이 바뀌는 길 위에서 내 인생의 진짜 봄날을 기다린. 어느 날 문득 그 봄길로 그녀가 걸어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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