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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Jul 31. 2023

어쩌다 마주친 행복

나의 주민등록 기재부에 아직도 우리 집 세대주로 올라가 있는 남편이 나를 처음 본 날, 그때도 장맛철이었던 것 같다. 그날 새벽에도 장대비가 쏟아졌지만, 나는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서 어딘가 심부름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스물두 살이었던 나는 한 손엔 기다란 우산을 들고 있었고, 시골길을 걸을 때 흙탕물이 튀어올라도 전혀 티가 나지 않는 우중충한 색깔의 체크 스커트 위에 긴 팔 상의를 입고 있었다.


남편은 지금도 해마다 여름이면 나의 첫 모습을 떠올리곤 하는데, 그것은 가끔 티 없이 순진하게 보이기도 했던 나의 첫인상을 기억해 내는 것이 아니라 그날 입었던 긴팔 상의와 롱스커트에 관한 기억 때문인 듯했다. 몇 해 전부터 앓고 있는 갱년기에 설상가상 화병까지 덮쳐서 수시로 열이 확확 오르는 마누라의 현재 시점에선, 습하고 무더운 장마철에 삼십여 년 전 그날 입었던 긴 옷 같은 의상을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정확하게 남편으로 인해서 화병을 얻은 게 맞지만, 법륜스님 말씀대로라면 그것은 다 내가 지어낸 병일 지도 모르겠다. 남편은 남편대로 마누라로 인해서 공황장애를 얻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판사 앞에 나아가서 시비와 경중을 저울질해 달라고 요청할 수도 없는 일이므로, 우리 부부에겐 서로의 첨예한 입장만이 있을 뿐이다.


젊어선 하루에도 몇 번씩 이혼을 생각했었다면, 나이가 든 지금에 와선 한 달에 몇 번 이혼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우리 부부는 하나의 주민등록부에 올라가 있고, 나는 삼식이 남편과 거의 매일 삼식을 함께 하며 주말마다 함께 근교로 산책을 다닌다.  


작년 여름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방문하고 있는 무주구천동 계곡은 나의 여름날을 건강하게 보내는 주말 성지가 되었다. 구천동 계곡을 따라 '어사길'이라 이름 붙여진 산책길을 따라 걷다 보면, 향적봉으로 올라갈 수 있는 조계종 사찰인 백련사가 나타난다. 산이 깊고 울창해서 펄펄 끓는 뙤약볕 날씨에도 구천동 계곡은 청량한 바람이 줄곧 분다.


나이가 들면서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재해와 전쟁의 위험 등으로부터 안전하게 목숨을 지키는 것에 부쩍 관심이 많아진 남편이 말했다.


"일단 삼단봉부터 주문해~ 오송 터널 사건 같은 일이 터지면 유리창을 부술 망치가 필요한데, 망치 갖고 다니는 건 그러니까 인터넷에 치면 경찰 삼단봉 같은 거 팔 거야, 우선 그걸 차에 넣고 다녀야겠어~"


남편 성격을 아는 마누라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예, 그랍시다~"


"그리고 혹시라도 전쟁 나면, 우리 가족 집합 장소를 정해놔야 할 거 같어. 각자 다른 데 있다가도 미리 정해 놓은 장소로 딱 모이도록 말이야. 여기 무주구천동 같은 곳이면 전쟁이 나도 안전은 하겠지~"


평소엔 신중함이라곤 잘 찾아볼 수 없는 남편이 미리 전쟁에 대비하여 약속 장소를 고민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누라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차라리 전쟁 핑계 김에 약속 장소까지 못 갔다 하고 어디 딴 데로 가는 방법도 있겠구나~'


마누라의 속마음을 눈치라도 챈 건지, 안전 염려증이 있는 남편이 다시 말했다.


"당신은 그냥 집에 있어. 내가 어떻게든 집으로 갈 테니까."


믿음직한(?) 남편의 뒤를 따라서, 나는 맨발로 계곡길을 걸어서 내려왔다. 구천동 어사길은 돌이 많은 지면이라서 맨발로 걸을 수 없지만, 계곡 맞은편에는 국립공원 관리 차량이 지나다니도록 포장된 길이 나있었다. 개미가 지나다니고 가끔 다람쥐가 가로질러 뛰어가는가 하면, 지렁이가 꿈틀거리며 느릿하게 움직이기도 하는 그 길을 나도 미물이 되어 맨발로 짚으며 따라 걸었다.


나는 그 숲 속에서 한순간 개미였다가 다람쥐도 되었다가 지렁이도 되고 사람이기도 하였다. 내가 지렁이였다가 개미였다가 할 때, 남편의 숱 없는 뒷머리가 부처님의 고결한 뒷모습 같기도 하였다.


절에서 뵈었던 부처님들은 한결같이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앞모습을 하고 계셨으므로, 내 앞에 가는 저 뒷모습이 부처님의 뒷모습이라고 생각해 본다 한들 죄짓는 것은 아닐 게 분명했다. 나를 평생 힘들게 한 것은 남편이 아니라 내 마음이었으며, 그걸 깨닫게 해 준 저 이가 부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마누라의 등산화를 한 손에 집어 들고 내려오며 부처 같은 남편이 "동쪽에서 부는 바람 님의 옷깃 스칠라~장독 뒤에 숨길까 이 내 등 뒤에 숨길까~나는 영원한 당신의 등불이 되리라~"하면서, 진성의 <님의 등불>을 목청껏 노래 불렀다.


계곡을 빠져나와 주차장에 다다를 무렵 천천히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노래를 실컷 부른 남편은 배 고픈 것도 잊고 구천동 앞 잔디밭에서 펼쳐지는 여름밤 콘서트를 구경하자고 내 손을 붙잡았다.


무대 위에 무명의 가수들이 오를 때마다, 여름휴가를 온 관객들은 크게 환호성을 지르며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주었다. 우연히 오게 된 콘서트에서 대부분 반바지 차림의 관객들은 여름날 저녁의 한바탕 흥취를 마음껏 즐겼다.


반달보다 조금 커진 달이 검은 밤하늘에서 살포시 웃고 있었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함께 웃고, 나도 사람들을 따라 덩달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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