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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Oct 11. 2023

타인의 오두막 7

'노동자의 책방'에서 저 멀리 바라다보이는 수평선이 형용할 수 없는 빛들을 끌어들이며 붉게 물들어갔다. 우리는 연실이 '우리 집'으로 표현하는 제주노총 지역본부 사옥을 빠져나왔다.


이번엔 최진의 덜덜거리는 작은 오토바이는 지부에 세워둔 채로 연실이 운전하는 작은 자동차에 우리 세 사람은 거의 동시에 올라탔다. 하나의 사물을 여럿이 함께 나눌 때 느껴지는 묘한 결속과 신뢰에 대한 인상은 나를 가끔 충만한 설렘으로 가득 채울 때가 있었는데, 그 시간도 그러했을 것이다.


연실이 살고 있는 낮은 집에는 집의 면적보다 두 배는 넓어 보이는 마당이 있었다. 연실이 저녁을 준비할 때 최 진은 연실의 주방일을 능숙하게 거들었다. 마당에 매달린 작은 전구들이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점점 환해지자, 사방에는 천천히 어둠이 드리워졌다.


마당에 펼쳐놓은 테이블 위로 최 진이 음식을 날랐다. 그날 비트의 오두막에서 준영도 저렇게 날렵하고 부드러운 몸짓으로 식사를 준비했었다. 왜 자꾸 최진에게서 준영의 모습이 떠오르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나는 혼자서 고개를 저어야 했다.


우리는 각자의 기호대로 가볍게 술을 따라 마셨다. 연실은 소주, 최 진은 맥주, 나는 막걸리였다. 업무적인 자리는 아니었어도, 우리는 현시점에서 제주 지부의 가장 큰 쟁점인 "이주노동자 조직화"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술자리 대화가 열띤 토론으로 변하는가 싶어질 때, 연실이 조용히 일어나서 마당 위에 작은 몸짓으로 원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대학 시절부터 연실은 나의 신경계에서 도파민이 과도하게 분비될 조짐이 보이면, 스스로의 몸을 땅 위에 던져서 나의 흥분을 가라앉히곤 했었다.


연실의 수법은 교에선 어느덧 우리 그룹의 전통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커질 때마다 조용히 제례의식의 춤을 추듯 몸을 움직이는 연실의 수법은 "나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하지 말자, 상대를 설득하려는 목적을 갖지 말자, 너도 좋고 나도 좋은 그런 방법이 어딘가 있을 거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라는 메시지를 넌지시 건네고 있었다. 연실의 춤사위를 보다가, 지금도 후배들 가운데 연실의 수법을 계승한 자가 있을지 문득 궁금해지기도 하였.


그날 저녁 연실의 마당에서 우리는 더 이상 '오롯이 합리적인 말들'만을 나누지 않았다. 사소한 말들이 오고 갔고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마음이 든든했다. 대학시절 연실과 나는 노동자들의 세상을 꿈꾼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함께 행복한 세상을 꿈꾸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노총 일을 하면서 어쩔  수 없는 합리성과 극도로 조심스러운 탐색 사이를 오가며 피로감을 얻을 뿐이었다.


신입생이었던 내가 강당에서 조연실 선배의 환영사를 들었던 날, 나는 운명처럼 그녀를 영원히 가슴에 새겼다.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실아우라는 가히 독보적이었다. 지금도 연실의 사무실에 작은 글씨로 쓰여있는 <밥만 나누지 말고 참된 마음을 나누자>는 글귀처럼, 연실과 함께 있으면 누구나 마음이 배부르곤 하였다.


연실을 따라 마당 위에서 둥그렇게 팔다리를 휘젓는 최진을 바라보다가 나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최 진의 동작은 흡사 식당 앞에 서서 가게를 홍보하는 기다란 풍선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를 향해 터뜨린 웃음을 발견한 최진이 약이 바짝 오른 소년처럼 다소 도전적인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연우씨 춤 한번 볼까요? 심판은 누나가 해주세요~"

 

그러자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손수건으로 닦아내면서 연실이 마당에 놓인 테이블 의자에 도로 앉았다. 최진도 다시 의자에 앉았다.


"나이 먹는다는 게 언제 제일 속상한 줄 알아? 좋은 벗들과 밤새도록 이야기 나누고 춤출 기운이 줄어들 때야. 얘기야 낮에 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어두운 밤하늘 아래에서 나눌 수 있는 이야기는 따로 있는 법이거든~"


나이 들어감을 진심으로 한탄하듯이 연실이 소주잔을 집어 들다가 이내 말을 덧붙였다.


"내가 사심 없이 심판하건대,  춤은 최진 승~조연우는 아직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할 수가 없어서. 춤은 말이야,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자만누릴 수 있는 선물이거든. 동작을 배워서 따라 추는 무용과는 다른 것이지."


나는 연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말 나온 김에, 두 사람 서로 경쟁 같은 거 하지 말고 한 팀으로 사랑에 빠져보는 건 어때? 저 하늘에 떠있는 별님들에게 물어볼 것도 없이, 너희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질 운명으로 보이거든~ 신원 보장, 인성 보장, 주례 보장까지 다 내가 하지. 일 년에 고작 두세 번 만나는 거, 그거 사랑 아니야.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는 거, 그거 사랑 아니지, 그런 허접한 유사품 사랑 말고 진짜 사랑 한번 해보는 거야~"


연실은 준영을 염두에 두고 그런 말들을 하는 것이었다. 연실도 지혜처럼 나와 준영과의 만남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반대하는 남자와의 만남을 나는 왜 팔 년이나 끌고 왔을까?' 그날밤 나는 가장 반짝이는 별에게 내가 모를 수도 있는 나의 속마음을 진짜로 물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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