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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Oct 26. 2023

마지막의 것들

두 달 전 작은 방을 얻어 독립해서 나간 큰아들이 하룻밤 자러 왔다. 요즘 어딜 가나 주차 문제가 큰 골칫거리인 만큼 아파트 주차 문제도 그야말로 장난 아니게 살벌하다. 아파트 관리 어플에서 방문객 차량 등록을 미리 해놓아야 방문객 차량이 들어올 수가 있다. 이런 시스템을 허용해 준 것만도 입주자대표회의에 감사할 따름이지만, 이것조차 악용하는 사례가 있으니 사람 사는 세상에 뒷구멍 없는 영역이란 애초에 존재할 수가 없는 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큰아들 놈의 방은 그대로 유효하다. 하룻밤을 포근한 침대에서 푹 자고 일어난 아들이 차려놓은 밥을 맛있게 먹고는 전역복에 전투화를 신고 집을 나섰다. 오늘로써 예비군 훈련 마지막 날이라고 하였다. 아들이 군에서 제대한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예비군 마지막 동원훈련이라니, 어미 된 자로서 마음에 감회가 새로웠다. 하기사 저 녀석이 세발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누비던 코흘리개 시절이 바로 어제 같기만 한데, 기억 속에 머물러 있는 나의 마음은 늘 시간성의 현재 법칙에 살고 있는가 보다.  


요즘은 무엇 때문인지 내 심사가 뒤틀려있는 게 며칠 되었다. 누군가 내 마음에 어긋나는 말이나 행동을 하게 되면, 마음속에서 공연히 시비를 가리는 분별심이 확 피어올랐다. '저 사람의 입장은 저러할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도저히 들지 않았다. 회비도 내지 않고 참석도 하지 않으면서 모임 당일마다 연락이 두절되고야 마는 후배의 입장을 고려할만한 아량이 생겨나질 않았다. 친구가 나에게 "너 옛날에는 안 그랬잖아~"라고 무심코 내뱉은 말에도, 살림살이 형편이 지금 같지 않았던 예전의 나를 무시하는 것으로 곡해해서 듣기도 하였다.  


한 집에서 사는 게 아닌 남들과 얽힌 그런저런 일들은 구태여 건드리지 않은 채로 그냥저냥 시간이 흐르면서 묻어두고 지냈건만, 이상하게도 한 집에서 생활하는 남편의 언행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거슬리는 족족 지적질을 했었다. 남편의 크리티컬 포인트가 불 보듯이 뻔한 지경에까지 이르렀음을 알면서도, 한번 삐뚤어진 나의 마음은 걷잡을 수가 없었다. 드디어 남편의 임계점 폭발.. (우리 남편은 화가 나면, 다 같이 죽자는 신념을 가진 자다)


앙앙대기는 해도 다 같이 죽자는 남편의 신념과는 정확하게 반대의 신념을 가진 내가 조용히 방문 닫고 안방으로 사라져 주었다. 오늘은 남편 손에서 공중부양된 물건도 없었으니, 이쯤에서 '너의 승리'로 마감 지어야겠다는 생각이 복부와 심장 사이 어딘가에서 꿈틀거렸다.


큰아들은 전역복을 벗어놓고 약속이 있다며 후다닥 제 집으로 돌아갔고, 저녁을 먹고 퇴근한다던 작은아들은 때 되면 들어올 테고, 나는 일찌감치 잠이나 청해볼 요량으로 화장실엘 들어갔다. 어, 변기 속 소변 밑에 붉은색이 펼쳐져있는 게 아닌가. 근 일 년 만에 보는 생리였다. 다음 달에도 생리가 나오지 않으면 산부인과에 가서 폐경 검사라도 해볼 생각이었는데, 덜컥 생리가 쏟아진 것이었다.


아하, 그제야 이해되는 내 몸의 바이오리듬과 감정 변화의 상관관계~ 누구는 생리가 다가올 때마다 평소에는 없던 도벽이 생겨난다고도 했고, 혹자는 성욕이 강해진다고도 했었다. 나는 과거 이십여 년 동안 생리가 다가올 때마다 남편이 그렇게나 꼴 보기 싫었었다. 아마도 그것은 여성들 각자의 내면에 가장 깊숙이 은폐되어 있던 감정 혹은 욕망이 이성의 데드라인을 무너뜨리고 치솟아 오르는 일시적 증상인 것 같았다.


과거지사 운운한들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남편이 이런저런 사건과 사고들로 나를 엄청나게 괴롭혔던 일? 글쎄다.. 요즈음 거의 매일같이 듣는 법문에 따르면, 나의 괴로움은 결국 남편의 잘못이 아닌 내 생각이 빚어낸 그림자 같은 것일 뿐이라 한다.


내 인생의 마지막 생리일지도 모르는 붉은 빛깔의 액체 앞에서 나는 순간 고요해졌다. 며칠간 내 속에 깃들어있던 짜증의 출처가 분명해지자, 참회까지는 아니어도 남편에게 공연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아직 내 안에 남아있는 여성성을 확인한 것을 기뻐해야 할지 의심해야 할지 마음의 입장을 정리하지 못한 채로, 나는 서랍 속에 깊숙이 넣어두었던 생리대를 꺼냈다.


인생에서 오고 가는 많은 것들 가운데, 오늘은 생리에 담긴 은폐된 감정의 민낯에 주목해 보는 날이었다. 우주만물의 법칙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것이라 한다. 큰아들은 마지막 예비군 훈련을 마치고 새로운 민방위로 거듭났고, 나는 마지막 생리가 될지도 모르는 이 생리를 끝으로, 이제 생산의 가능성을 내포한 여성이 아니라 다시 새로운 인간 존재로 거듭날 수 있으려나 그것을 생각해 봐야겠다. 이제 더 이상 같이 사는 남편이 미워지지 않는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 할 때가 온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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