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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Nov 10. 2023

타인의 오두막 8

여자가 아내가 있는 남자를 만날 적에는 '돈'이 아니면 '눈먼 사랑'이 목적일 뿐이다. 지나간 여름의 끝자락에서 타인의 오두막에 다녀온 날로부터 내 마음속에선 정체가 불분명한 공허가 하나 생겨났었다.


여름의 태풍은 아주 오래전 일도 아니고, 타인의 오두막을 다녀오고 나서 고작 한 계절이 바뀌었을 뿐이었다. 태풍이 오던 날 우리는 뜨겁게 사랑을 나누지 않았던가. 그와 처음 만난 날도 태풍이 몰아치던 날이었다. 그가 나에게 태풍 같은 사람이듯이, 나도 그에게 태풍 같은 사람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한바탕 휘몰아쳤다가 주변의 것들을 파괴하고 사라지는 태풍..


타인의 오두막에서 준영과 헤어져 돌아온 날부터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공허는 별다를 바 없이 흘러가는 나의 일상 속에서 괴수처럼 나를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 나는 내면에서 깨어난 괴수의 힘을 약화시키려 하거나 아예 처단할 계획까지도 세워보았으나 모든 게 헛수고였다.


공허라는 이름의 괴수는 준영을 만난 뒤 흘러간 팔 년이라는 세월의 무게를 한낱 먼지처럼 우습고 가벼워지도록 만들었다. 우리가 알고 지냈던 그 시간 속에서 준영이 나의 일과 신념에 대하여 다분히 호의적인 입장이 아니었던 것으로 느껴진 것이 그렇게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게 될 줄은, 나조차도 미처 알지 못했던 이었다.


'나는 그동안 그로부터 무엇을 받고 살았는가?' 이런 하찮은 질문이 내 안에서 떠올랐을 때, 나는 온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준영이 아니더라도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나의 질문은 언제나 "내가 그에게 무엇을 주고 싶은가?" 이것뿐이었다. 연실은 나의 그런 한 방향으로의 질문이 내 이기심과 교만의 극대화라고 지적했었다. 사람은 주는 존재만 되어서도 그렇다고 받는 존재만 되어서도 안된다고 연실은 말했었다. 그녀는 내가 주고받을 줄 아는 건강한 사람이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노동자들의 연맹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에도 자본가와 노동자들 사이에 <정당하게 주고받을 줄 아는> 건강한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라고 연실은 말하곤 했다. 밤이 새벽에 의해서 쫓겨가듯이 올바른 신념은 세상을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도 있다고 학창 시절의 연실과 나는 숱하게 되뇌었었다. 그리고 아직 결혼의 이력이 없는 연실은 '사랑'도 그러해야 한다고 지금도 믿고 있었다.


어차피 서울로 돌아가서도 나의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나는 서울 사무실에 올라가서 해야 할 일을 제주도에 며칠 더 머물면서 마치기로 하였다. 일주일이 멀다 하고 광장에 모여 집회를 이끄는 데에 언제부턴가 나는 스스로 참석하지 않게 되었다. 집회만 있으면 아무 조건 없이 달려 나가곤 했던 내가 광장에 나가지 않게 된 것은, 연맹 사무실에서 동지로서의 조연우보다 비용과 효율성 측면에서의 조연우를 더 필요로 하는 것 같다고 느껴질 무렵이었을 것이다. 분석력과 기획력이 출중한 정책가로서의 조연우는 노총이라는 거대한 조직을 위한 하나의 부품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의심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의심은 결국 배신을 수반한다. 그것은 상대방의 배신이 아니었다. 의심을 하고 있는 나에게서 비롯되는 배신이었다. 조직에 대한 의심이 생겨난 뒤로 광장에 가지 않았던 것처럼, 준영이 나의 일과 신념을 옹호하지 않을 거라는 의심이 들었던 순간에 준영에 대한 나의 배신은 이미 시작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준영에 대한 나의 사랑을 배신할 핑곗거리를 찾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태풍이 몰아치던 날의 그 아찔한 절벽과도 같은 밤은 사라졌다. 불과 두어 달 전의 일인데도 정말 오래된 옛이야기처럼 기억될 뿐이었다. 제주도에서 연실과 함께 지내는 동안, 나는 내 안에 있는 공허를 맞닥뜨리지 않았다. 나는 늘 연실과 함께였고 또한 거기엔 최진이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제주도에는 밤이 길게 찾아오는 것도 같았다. 제주도에선 뒤척이지 않고 쉽사리 잠에 들면서도 얼른 내일이 오기를 기다리기 일쑤였다. 육체의 욕망을 건드리지 않고도 도달할 수 있는 쾌락이 있다는 것에 새롭게 눈 뜬 날들이 집시의 노래처럼 너무 짧고 강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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