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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Dec 15. 2023

냄새

얼마 전 친구들과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서울의 봄" 이야기가 나왔다. 친구 A는 그녀의 남편과 함께 영화를 봤는데, 그녀의 남편은 영화가 끝나고 나오면서 영화를 한번 더 보고 싶다고 말했단다. 친구 A는 영화를 보는 내내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올라 극장에서 뛰쳐나가고 싶을 정도였다는데, 사람마다 영화에 대한 해석과 심리 상태는 사뭇 다른 것 같더라는 이야기였다.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고 이미 지나간 역사인데도 불구하고 부질없는 희망의 불씨 같은 것들이 관객석으로 동시다발적으로 퍼져나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었다고, 그 친구가 덧붙여 말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 남편에게 물었다. "서울의 봄 안 보실라우?" 남편은 평소와는 달리 신속한 어조로 나의 질문에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분통 터질 것 같아서 안 볼랴."


남편은 영화를 보지 않겠노라고 하고 내 몸 상태도 영 신통칠 않아서 나는 며칠 동안 "서울의 봄"을 잊고 지냈다. 그러다 문득 12월도 중순을 향해 가고 있다는 인식에 퍼뜩 도달하면서, 어제 아침에는 잠에서 깨자마자 동네 영화관의 상영시간표를 검색했다.


평일 조조 시간인데도 이미 예매된 좌석들이 꽤 많았다. 명당석에 해당하는 좌석들은 대부분 예매가 끝난 터라, 하는 수 없이 그나마 상영관 가운데 블록의 자리 하나를 클릭하였다. 내가 예매한 좌석 옆으로 한 자리 건너에는 누군가 벌써 예매를 마친 상태였다.


도로가 막히는 출근 시간을 피해서 느지막이 출근 준비를 하고 있는 남편이 안방에 딸린 욕실을 쓰고 있었다. 물론 저쪽 욕실은 비어있었지만, 나는 양치질만 하고 서둘러 옷을 입었다. 세수를 하지 않았으니 덩달아 스킨로션도 패스하였다.


나는 대충 걸친 후드티에 잠바 하나를 집어 들고나가다가, 화장대라고 하기에도 마냥 민망선반 위에 늘 뻘쭘하게 서있기만 했던 향수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후드티 위로 서너 번 분사를 하였다. 아니 다섯 번 분사를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세수조차 하지 않은 아줌마 옆으로 행여나 깔끔스러운 관객이 운나쁘게 앉게 될 경우를 우려하여 벌인 짓이었다.


비장과 위장 그 어느 쪽의 원인이든 간에, 나는 어려서부터 화장품 냄새에 극히 예민한 편이었다. 그래서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평소에 향수를 쓰지 않는다. 향수병을 손에 들고 뿌려본 것이 그야말로 열 손가락 가운데 몇 개는 남을 정도다.


동작 빠른 마누라가 화장실 문 앞을 휘~익 지나가며 "나 서울의 봄 조조 보러 가요~"라고 크게 말하자, 머리에 샴푸를 바른 남편이 "어~"하고 대답하는 소리가 뒤따라 들려왔다.


허둥지둥 극장엘 도착하여 내가 예매한 좌석을 확인하는데, 예매할 때 비어있던 내 옆좌석에 누군가 앉아있는 게 보였다. 이제 2분 후면 영화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상영관 맨 뒤로 등받이가 높다랗고 좌석이 넓은 붉은색의 프리미엄 의자들이 텅텅 비어있는 게 눈에 띄었다. 통신사 멤버십 예매 사이트에선 선택이 불가능했던 프리미엄 스위트 좌석으로 나는 주저 없이 당당하게 가서 앉았다.


안경을 꺼내 쓰고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 나서야 나는 바쁘게 서둘렀던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상영관의 불이 꺼지고 출입문이 닫히는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사방이 어두워진 공간에 묵직하게 내려앉는 효과음 속에서 커다란 스크린에 글씨들이 먼저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스크린은 이내 배우들의 모습으로 가득 찼다.


그런데 영화가 시작되고 십 분이나 지났을까. 아직 영화는 초반부이고 분통 터지는 장면들은 조금 더 후에 나올 텐데, 내 속은 이상하게 벌써 언짢아지기 시작했다. 그건 12. 12 군사반란에 관한 알량한 내 지식 때문도 아니고, 온 국민을 절망과 분노로 가득 찬 탄식에 잠기게 하는 영화 때문만도 아니었다.


샤워는커녕 세수조차 하지 않고 뻔뻔스럽게 외출을 감행한 대가로 스스로 선택한 나의 보상법에 문제가 생긴 이었다. 삼 년 전쯤 후배가 선물했던 향수를 사용해 본 지가 이년이 넘은 탓에, 얼마큼의 양을 분사해야 적절한 지 감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내 몸에서 올라오는 향수 냄새에 머리는 어질어질하고 속은 메슥거리는데, 전두광은 마치 삼국지 속에 나올법한 교활한 지략가의 면모마저 풍기고 있었다. 듬성듬성 남아있는 머리털을 차분하게 빗질해서 넘긴 전두광의 얼굴에서 예전에 남자 어른들이 쓰던 향이 진한 스킨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어린 시절의 나는 그 스킨 냄새를 맡을 때마다 구역질을 했었다.


영화가 끝날 무렵에까지 내 몸에서 올라오는 진한 향수 냄새의 어지럼증은 가시질 않았다. 게다가 답답하고 토할 것만 같은 그 시대의 악한 냄새가 스크린을 뚫고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하나회와 전두광의 악행을 막을 수 없었던 무지들의 합산이 우리의 역사가 되어버렸듯이, 향수에 대한 나의 무지로 인해 나는 그날 어지럼증을 감내해야만 했다. 무지와 나쁜 결과는 언제나 짝꿍이라는 걸 까먹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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