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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Dec 07. 2023

스르르 열릴 때

오래되어 낡은 아파트에 이제는 아무 힘이 없는 부모님 두 분만이 생활하고 있다. 두 분 가운데 누가 먼저 죽음을 맞이한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다. 죽음이 그리 멀지 않은 일임을 알면서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지금도 자주 다투신다. 다툰다기보다는 아버지의 일방적인 지시와 결정에 어머니가 역정을 낸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아버지를 향한 원망과 분노가 아직도 어머니의 가슴속에서 그 뿌리를 지탱하고 있는 까닭이다.


힘없는 어머니가 힘없는 아버지에게 대들다가도 밥때만 되면 주방으로 가서 요깃거리를 장만하는 걸 보면, 부부 생활 29년 차인 나로서도 가끔 아리송할 때가 있다. 저건 절대로 '정(情)'은 아닐 것이 분명하였다. 아마도 그것은 육십 년이 넘는 혼인의 세월 동안 삶으로 굳어진 일종의 습관 같은 것일 뿐이리라. 이제 당신 한 몸 가누는 것도 어려운데 누가 누구 밥을 차려줄 수 있단 말인가. 그 어려운 희생을 잘 걷지도 못하는 어머니가 아직도 하고 계신다.


나는 일 년 전부터 부모님 댁 빨래를 우리 집으로 가져와서 세탁을 하고 있다. 부모님의 옷가지를 세탁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아버지의 팬티에는 갈색빛의 얼룩이 조금씩 묻어 있었다. 그건 소변 자국이 아니었다. 대변의 흐릿한 자국이었는데, 나는 그것을 부모님 집에 비데가 없어서 뒷정리를 깔끔하게 못하신 걸로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항문이 꽉 닫히지 않는 것 같은 증상이 대장암 수술과 전립선암 발견 이후 매일 드시는 약 때문에 빚어진 일이라고 생각하고 계신 듯하였다. 그런 증상이 아버지가 복용하고 있는 약들과 관계가 있는 것인지 의사 선생님에게 물어보라고 내게 말씀하셨다.


나는 그제야 덜커덕 겁이 났다. 대학시절 매년 여름마다 봉사를 떠났던 꽃동네 인곡자애병원의 환자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병상에 누워 임박해 오는 죽음을 맞이하는 환자들은 괄약근을 조절하는 힘을 오래전에 잃어버린 듯했었다. 그곳에 있는 환자들은 지금 나의 어머니처럼 기저귀를 차고 있었다.


그분들의 기저귀를 갈고 가래를 치우고 목욕을 시켜드렸던 일들을 이제는 내 부모에게 하게 되었다. 나의 부모도 머지않아 죽음을 맞이하게 될 건 자명한 노릇이다. 요즘 자꾸만 이불 속에 들어가 잠을 청하는 아버지의 몸은 그때 환자들처럼 점점 더 가벼워지고 있다.


어제는 수요일이었다. 부모님과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아슬아슬하게 주차되어 있는 차량 한 대가 마음에 거슬렸다. 애매하게 주차되어 있는 차량의 전화번호 표시판 옆에 장애인 표시가 붙어있었다. 그 차주에게 전화를 거는 것을 포기하고, 나는 차에 타고 있던 아버지를 내리라고 하였다.


"아버지, 뒤에 서서 잘 보세요. 큰소리로 말해주셔야 해요."


임무를 맡은 백발의 아버지가 가느다란 몸으로 막내딸이 운전하는 차에서 내렸다. 아버지는 후진하는 내 차를 향해 수신호를 보내며 팔을 흔들었다. 새로 사드린 거위털 잠바와 모자가 아버지의 백발과 어울려, 백미러에 비친 아버지는 잠시나마 건강했던 예전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였다.  


"의사 선생님한테 말하면 약을 바꿔줄지도 몰라요. 별 거 아녀요~"


어느덧 기운이 없어 웃음도 없어진 듯한 구순의 부모에게 나는 허튼소리로라도 괄약근 운동법 따위 설명해드리지 않는다. 그냥 조금씩 걷고 조금씩 먹고 많이 자는 게 지금 내 늙은 부모의 할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내 늙은 부모님 안에 혹여라도 여전히 비좁어두운 마음의 동굴이 있다면, 병들고 늙어서 꽉 닫히지 않는 항문처럼 그 마음의 동굴이나 스르르 열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삶과 죽음 어디에서건 단정한 항문만큼이나 상쾌한 마음도 중요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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