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라지 Dec 19. 2023

나의 앎

나는 여전히 약을 먹고 있다. 마약류는 아닌 것은 확실하지만, 부정맥과 갱년기로 인한 불안증을 다스리는 일종의 자율신경제이다. 몇 해전 이 약과 함께 먹었던 수면제 처방은 이제 받지 않는다. 잠을 못 자면 못 자는 대로 요즘은 그럭저럭 버티며 일상생활을 해나가고 있다.


이러한 불안증세가 시작된 지점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남편을 처음 만났던 시기에 즈음하는 것도 같다. 불과 삼십여 년 전만 해도 남자가 맘에 드는 여자를 따라다니는 것이 남자의 멋으로 여겨지기도 했던 시절에 남편은 나를 죽도록 따라다녔다. 지금이야 스토킹범죄에 해당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나만 좋으면 그만이다'라는 식의 발상이 엄격히 말해서 폭력이라는 것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런 논리로 간다면 나의 결혼은 폭력에 의한 굴복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에 이르러보니 그 모든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철저하게 깨닫는 중이다. '나의 삶'이라는 명제 앞에서 더 이상 어떠한 변명이나 핑계 따위 붙이지 않기로 하였다. 그 시절 내가 막연하게 동경하고 있던 '선'을 향한 집념과 기독교를 베이스로 하여 내가 구성했던 '나의 '에 의하여 남편과의 결혼을 결정한 것은 오롯이 나의 선택이었다. 그러므로 남편과의 결혼이 나의 불안증을 유발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타당성을 상실한다.


남편이 죽자 살자 나를 쫓아다니던 그 무렵 나의 언니들은 두 명 다 수녀원엘 들어갔었다. 그들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된 수녀원은 언니들을 도로 집으로 돌려보냈다. 수녀원에서 쫓겨 나온 딸들의 정신병을 마귀가 쓰인 것으로만 치부하고, 종교적 차원의 해결법만을 모색하였던 어머니의 고집과 '어머니의 앎'은 삼십 년 동안 언니들의 병을 더욱 악화시킨 결과만 초래하였다.


지금 언니들은 같은 정신병원의 각기 다른 병동에서 생활하고 있다. 어머니의 애절함만큼은 아니었겠지만, 기적을 바라는 나의 기도 역시 삼십 년을 한결같이 간절했었다. 그리고 이제 '나의 앎'은 더 이상 기적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선명하게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밥 먹여주고 잠 재워주고 세상의 다른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언니들을 지켜줄 수 있는 보호처제공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나 자신에게 수백 번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래야 내 마음의 슬픔과 고통이 조금 잦아들기 때문이었다. 정상적인 뇌신경물질이 전달되지 못하는 뇌신경계를 가지고는 있지만, 언니들은 망가진 뇌신경계 속에서나마 '그들만의 앎'을 구성하고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나는 결혼생활의 풍파와 늙은 부모님과 언니들 걱정에 삼십 년간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그런 내적 불안을 가지고 일상을 살아내야만 하는 나와 언니들 가운데 누가 더 편안하고 행복할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돈 걱정, 먹고살 걱정, 부모님 돌보는 걱정, 남편과 자식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운 언니들이 어쩌면 나보다 편안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이르면, 언니들에 대한 연민의 고통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그러면 나의 불안도 점차 사그라들기도 하므로, 더 이상 언니들에 대한 걱정으로 인해서 불안증세가 가중되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구순을 바라보는 늙은 부모님 걱정이야 자식 입장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기에, 어찌 보면 나의 불안증에 해당되는 항목에서 제외시키는 게 옳을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에게 여러 고난의 시간을 선물했던 남편 덕분에, 나는 어떤 부분에선 제법 쓸모 있고 유능한 사람이 되었다. 그 덕분에 부모님 댁 돌봐드리는 일쯤이야 기실 그렇게 어렵지가 않다.


살면서 나를 불안하게 했던 요소들에 대해 주욱 적어내려오다 보니, 지금 나에겐 걱정거리가 하나도 없는 게 맞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것이 요즘 내 두뇌가 구성하고 있는 최신 버전의 '나의 앎'이다. 나는 지금 이대로 온전히 평화로운 존재일 수 있고 행복한 존재여야 마땅한 것이다.


언니들을 병원에 입원시키고 나서부터 더욱 깊게 빨려 들어갔던 어두운 구덩이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나는 매일 법문을 찾아서 들어야만 했었다. 마음이 힘들 때 음악이 치유 효과가 있다고는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밴드의 노래조차 들을 수가 없었다. 거의 일 년 만에 '오아시스'의 노래를 들었다. 아무 근심 없이 오아시스의 노래를 들으며 가볍게 몸도 흔들거려 보았다. 오아시스의 노래가 어느새 법문이 되었다.




작가의 이전글 냄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