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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Dec 21. 2023

근거 있는 반찬들

연말은 연말이다. 나의 이십 대 시절 거리마다 가득 찼던 캐럴송을 아예 들을 수 없다는 걸 빼고는 크리스마스 시즌인 것만은 분명하다. 12월만 해도 나는 벌써 세 번이나 술자리를 가졌다. 따지고 보니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술을 먹고 있는 셈이다.


모임엘 갔다 온 다음 날 저녁마다 식탁이 평상시와 조금 다르게 전개되고 있음을 "not so smart"한 남편은 금세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느 날 오징어 숙회가 올라오면, 마트에서 이 아줌마가 오징어를 한 마리 사 왔나 보다 생각했을 것이다. 며칠 후 반찬으로 올라온 소시지 색깔이 알록달록한 걸 보고는, 마트에서 소시지 세일을 했던 것으로만 여겼다.


그러다 며칠 전엔 대방어와 광어회가 동시에 접시에 담겨 식탁 위에 올라온 적이 있었다. 드디어 남편이 내게 물었다. "이거 어제 삼학도에서 싸 온 거여?" 나는 대답했다. "너무 많이 남아서 싸왔죠~" 그러자 무던한 남편이 횟감을 칭찬하며 한 마디 더 거들었다. "상추랑 깻잎까지 싸줬나 보네, 역시 이 집 회는 다르구먼~"


남편은 내가 술 먹는 날이면 대체로 모임 장소까지 태워다 주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12월에 가진 세 번의 술자리에도 나는 예외 없이 남편의 차를 타고 나갔다. 일반 직장인들보다 일찍 퇴근하는 데다 체질상 술을 못 먹는 남편의 저녁 시간은 비교적 한가로운 편이라서, 나는 남편의 드랍(drop)과 픽업 서비스를 종종 이용한다. 얼핏 보면 내가 어디에 가서 누구와 술을 먹는지 확인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겠지만, 남편의 선의에 그런 계산까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내가 모임에 다녀올 때마다 부스럭거리는 비닐봉지를 들고 들어가는데도, 남편은 그런 거에 전혀 신경 쓰는 타입이 아니다. 직접 사냥한 것도 아니고 어획한 것도 아니므로, 나도 구태여 모양 빠지게 내가 무엇을 싸가지고 돌아왔는지 자랑하지 않는다. 다음 날 저녁 식탁에 조용히 반찬으로 내어놓으면 그만이다. 대방어 회처럼 평상시와는 너무 다른 반찬이 올라왔을 때나 남편은 무심하게 한번 물을 뿐이다.


남들이 먹다 남긴 거라고 숫제 외면하거나 쓰레기통에 내다 버리는 깔끔쟁이가 아니라서, 아마도 나는 지금껏 남편과의 동행을 이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so smart"한 청결쟁이랑은 여태껏 동반자로 살아오기 어렵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서양 고대철학은 자연 철학에서 출발하였다. 이것은 철학사에서 의미 있게 다뤄지는 주제이기도 한데, 인간의 이성으로 세계의 근원을 파악하려는 시도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자연 철학이 등장하기 이전에 고대 그리스인들은 초자연적인 신들의 계시를 통해 세계를 받아들이고 해석하였다. 우리는 흔히 그 시대를 "신화(mythos)의 시대"라고 부른다.


신화의 시대에서 철학의 시대로 넘어오면서, 인간은 "로고스(logos)"를 통해 만물의 근원에 도달하고자 하였다. 어떤 특정한 원리에 기초해서 세계를 설명하려는 이러한 시도는 과학적 사고의 출발이었다. 그래서 고대철학은 모든 학문을 통합하고 아우르면서 동시에 그 자체로서 "science" 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전통 때문에 서양 철학적 사유에선 "근거"를 우선할 수밖에 없다. 상상력으로 가득했던 신화의 시대와 달리 철학의 시대에선 이성에 기반한 논리가 바탕이 되는 건 자명한 일이므로, 근거를 찾아가는 일은 곧 논리적 사유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술자리 모임에서 돌아올 때마다 싸들고 왔던 '남은 안주들'이 다음 날 저녁 식탁의 반찬으로 변신한 데도 다 그만한 근거가 있는 법이다. '다음날 저녁 반찬'이라는 매우 긍정적인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오징어 숙회와 소시지와 횟감 등은 '전날 안주'의 형태로서 모양을 갖추고 있었다. 2023년을 마무리하며 반가운 친구들을 만났던 작용이, 안주의 변신을 촉발시킨 원인이 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다.


그러고 보면 '반찬'으로 변신한 '안주'들의 근본엔 그리움이 흰 눈처럼 소복이 쌓여있었는 지도 모른다. 내 인생의 날들 속에 아직 그리운 얼굴들이 많다는 것이 오늘은 제법 위로가 되는 눈 쌓인 겨울밤이다. 밤이 길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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