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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Dec 27. 2023

눈썹

나에게 있는 몇 개의 무능함들 가운데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것 중의 하나가 '화장술'이다. 스킨로션 등의 기초 스킨케어에 선크림은 필수로 바르긴 하지만, 나는 아직도 색조화장이 무엇인지 모른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젊었던 그 시절에도 예쁘게 눈썹을 손질하고 덧 그리는 기술은 물론이거니와, 얼굴의 잡티 등을 커버하는 화장품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도 분명 있었다. 한두 명 있는 정도가 아니라, 대다수가 자기 방식의 화장법과 화장품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청소년기를 거쳐 성인이 되고 나서도, 우리 집엔 가족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화장대 위에 달랑 스킨로션이 전부였다. 간혹 어머니의 영양크림이 한 개 더 추가될 뿐이었는데, 어머니의 영양크림은 너무 기름져서 우리 자매들은 뚜껑조차 열어보지 않았다. 어머니를 닮아 화장품에 무지했던 세 자매는 그 시절 존슨즈베이비로션 하나면 최고 좋은 화장품을 쓰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화장대 옆에는 우리 집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장식장 선반이 거실의 중앙 벽에 웅장하고도 기다랗게 놓여있었다. 선반 위에는 꽤 부피가 큰 대형 초들이 십자고상 아래 언제나 짝을 이루어 불을 밝히고 있었다. 나는 성당의 제단 청소를 하듯이, 우리 집 거실장 위에 있는 예수상과 성모상을 조심스럽게 닦곤 했었다.


열어젖힌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의 정렬 속에서 장엄한 그레고리오 성가만 울려 퍼지면, 그야말로 우리 집은 수도원 그 자체였다. 나도 그 작은 수도원에서 언니들처럼 거룩한 수도자의 삶을 막연하게 꿈꾸었던 적도 있었다.


화장품 같은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던 어머니의 다소 여성스럽지 못한 기질과 조용한 수도원 같은 분위기의 집안에서 성장한 탓이었을까. 나는 지금껏 오십삼 년 인생을 사는 동안 특별히 화장술의 필요성을 느낀 적이 없었다. 기미와 검버섯을 유발한다는 자외선만 차단하면 나는 그걸로 매우 족했다.  


하지만 외모에 대한 지향점이 일도 없는 나와는 다르게 남편은 자신의 외모를 가꾸는 데 지극정성인 편이다. 그런 노력 덕분에 남편의 미모는 현재 역주행 중이다. 저대로 앞으로 십 년 이상만 더 유지해서 경제활동을 할 수 있다면, 마누라 입장에선 썩 괜찮은 이문이 남는 장사 아니겠는가.(미모 관리해서 바람피울 놈이면 미모 관리 안 하고도 바람은 다 피우는 것이니, 아낙네님들은 섣부른 걱정일랑 도로 집어넣으시길 바란다.) 나에게 무엇이 이로운지 영특하게 계산해서 사는 게 장땡이다.


그런데 문제는 남편이 본인의 미모만 관리하면 되는 것을, 외모에 도통 무관심한 마누라까지 채근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십 대의 고왔던 마누라가 어느새 너무 늙어버려서 남편의 마음이 서글퍼진 것일 수도 있겠지만, 예쁜 여자가 아니면 상대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인생관에 스크래치가 날까 봐서 염려되는 마음도 조금은 작용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급기야 남편은 유튜브로 눈썹 그리는 걸 배웠다. 그릴 때마다 매번 달라지는 마누라의 눈썹이 남편은 적잖이 실망스러웠던가 보다. 산책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마누라를 식탁 의자에 앉혀놓고, 남편이 마누라의 눈썹 위에 초승달 같은 눈썹을 그려 넣었다. 자신의 그림 솜씨에 스스로 만족해하는 남편을 따라, 곱게 그려진 눈썹을 휘날리며 우리는 만뢰산 눈길을 둘이서 걸었다. 아무도 걷지 않은 하얀 눈밭 위로 남편의 발자국이 찍힌 자리를 내가 뒤에서 밟았다.


회색 털모자를 깊게 눌러쓴 비구니 스님이 보탑사 앞마당에 쌓인 눈을 쓸고 계셨다. 짙은 잿빛의 하늘이 고요한 사찰 위로 알이 굵은 싸라기눈을 다시 뿌려놓고 있었다. 남편이 그려준 늙은 마누라의 눈썹 위로 하얀 눈이 쉼 없이 흩날렸다. 그날은 이천이십삼 년 전 예수가 태어났다는 성탄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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