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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Jan 12. 2024

저녁 바다

밤바다라고 하기엔 아직 이른, 사물의 구별이 가능한 시간이었다. 도로 옆에 간간이 서있는 나무들의 기다란 몸체들이 여전히 겨울의 한가운데서 허허로운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스산하고 어둑해진 저녁 하늘 위로 한 무리의 기러기들이 끼룩끼룩 소리를 내며 이동하였다. 나는 무심히 자동차 모니터 안의 숫자를 쳐다보았다. 모니터 시계는 오후 6시 13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이휴, 벌써 캄캄한데 아직도 이동 중이라니.. 적당한 데서 자고 가야 할 텐데, 어디로 가는 걸까요?"


기러기떼가 캄캄해져 가는 바다 위를 날고 있는 모습에도 나는 공연히 근심스러웠다. 그네들은 근심하지 않는 것을 내가 근심하고 있는 모양이 문득 우스워졌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나는 부모님을 돌보는 데 지쳐가고 있었다. 예전에 알고 지냈던 성당 형제님의 모친상이 있다길래 나는 남편을 덥석 따라나섰다. 당진으로 가면 바다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상 중에 이런저런 일들 때문에 거쳐가야만 하는 지역들을 잠깐씩 방문하는 것이 요즘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여행법이었다. 짧은 시간이긴 해도 그런 시간들 속에서나마 나는 잠시라도 숨통이 트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남편도 나도 당진청주고속도로가 개통한 줄도 모르고 있다가 난생처음 그 길로 들어서보았다. 업그레이드가 되지 않은 남편 차의 내비게이션이 새로 난 도로로 들어서자 갑자기 혼미해지더니 길을 잃고 급기야 시간 계산마저 잃어버렸다.


당황한 남편의 얼굴이 붉어지기 전에, 나는 재빨리 휴대폰의 티맵을 열었다. 그제야 안심이 된 남편이 티맵의 위력과 마누라의 신속함에 새삼 놀라는 눈치였다.


우리가 인생길을 살아오면서 길을 잃고 헤맨 적이 한두 번이었던가. 고요한 평화로움을 선호하는 마누라와는 반대로 무엇이든 도전해서 가족들 굶기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온 남편의 진취성은 서로 부딪힐 때가 많았지만, 끝내 우리는 한 팀으로 운명을 같이 헤쳐나가고 있는 셈이었다.


대부분 그렇듯이 우리 부부의 지나온 역사 속에도 지침이 될만한 가르침이나 안내지도가 없던 것도 같다. 저녁하늘 위를 비행하는 기러기 무리에게는 어떠한 지도가 있는 것인지 그것이 몹시 궁금해졌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없는 겨울날이라서, 지인의 모친 저승길 가시는 길이 조금은 수월한 것 같기도 하였다. 그 밤에 쉴 곳을 찾아 이동하는 기러기들의 비행도 조금은 수월했으면 싶었다. 그리고 고작 일 년이 지났을 뿐인 나의 부모님 돌봄도 너무 힘들지 않게 지나갔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었다.


진취적인 걸 뛰어넘어 성급하게 타오르던 남편 성정의 불길을 잡는 데 삼십 년 세월이 뚝딱 흘렀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을 삼십 년도 참아줬는데, 내 부모님 돌봐드리는 데 앞으로 몇 년을 못 참겠는가.


이제 철이 조금씩 들어가는 남편이 아직 청년의 몸짓으로 저녁바다의 마지막 표정을 사진으로 담았다. 그 풍경 속에 늙어가는 마누라의 지친 얼굴도 몇 장 있었다.


금실 좋기로 소문난 원앙은 짝을 잃으면 금세 새로운 짝을 찾아 인연을 맺는단다. 워낙 사이가 좋기 때문에 혼자서는 도저히 외로워서 못 산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러기는 짝을 잃으면 그대로 혼자 살다가 이승을 하직한다고 한다.


오십이 넘으면 기러기 같은 남편도 원앙 같은 남편도 부질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냥 내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더구나 내게는 넘어야 할 네 번의 초상(初喪)이 남아있지 않은가. 밤의 시간으로 달려가는 바다 위를 여전히 한 무리의 기러기들이 날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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