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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Jan 17. 2024

모종삽

거래처에 돌릴 설 명절 선물을 사기 위해 남편과 마트엘 들렀다. 남편이 사장님이고 나는 그의 직원에 불과하지만, 모든 회계 업무에 있어서 결정권은 나에게 있는 편이다. 코딱지만 한 규모의 사업장이다 보니 사장도 직원도 한가할 때가 많아서 둘이서 나란히 마트 구경을 나왔다. 사무실로 배송되어 온 명절 선물 책자에서 미리 골라둔 선물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뒤 결제를 하기까지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이왕 온 김에 다양하게 진열되어 있는 명절 선물들도 구경하고 사무실에 가져다 놓을 키 작은 묘목도 하나 구매했다. 마트에서 판매하고 있는 뱅갈고무나무 묘목이 제법 실해서 사무실 창고에 비치해 둔 도자기 화분에 옮겨 심으면 썩 어울릴 것 같았다. 남편이 고무나무가 심어있는 검은색 플라스틱 화분에 눈길을 주면서 내게 물었다.


"모종삽 집에 있는 거지? 없으면 하나 사갈까?" 나는 남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답했다. "아무렴요, 집에 있고 말고요." 선선하대답은 했지만, 나는 모종삽을 최근에 보지 못한 사실에 내심 불안했다. 사람은 저마다 핸디캡 혹은 아킬레스건이 있지 않은가. 나의 최대의 약점은 외식포함한 생필품 구매 외에 쓰는 일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것이며, 동시에 엉뚱하게 새는 일에 몹시 민감하다는 것이다.


(1) 10원 단위까지 계산해서 가격 비교를 한 뒤에 구매한다.

(2) 엥겔지수는 낮지만, 그렇다고 다른 데 지출되는 비용이 많은 것도 아니다.


무엇이든 할인률 적용이 높은 것을 선호하거나 혹은 아예 구매 의사가 없기도 하는 나의 소비성향은 요즘 잘파(Zalpha)세대에 비한다면 그야말로 미개인 수준일 지도 모른다. 내게는 패션 정보를 알려주거나 옷을 공유할만한 딸은 없지만, 나보다 큰 사이즈의 옷을 입는 아들은 두 명 있다. 오버핏, 와이드핏이 유행인 시대에 엄마가 아들 옷 좀 입는다고 크게 흉 잡힐만한 세상도 아니라서 너무 흐뭇할 뿐이다.


마트에서 선물 배송 날짜를 약속하고, 남편은 나를 집에 떨구어준 뒤 고무나무 화분을 싣고 사무실로 돌아갔다. 현관 앞에서 신발을 벗자마자 나는 에어컨 실외기실부터 들어갔다. 내 기억의 저편에 있는 모종삽을 찾기 위해 실외기 공간과 다용도실 수납장, 심지어 신발장까지 샅샅이 뒤졌는데도 모종삽은 보이지 않았다. 넓지도 않은 아파트에 자잘하게 숨겨져 있는 것들은 어찌나 많던지, 모종삽 하나 찾으려다가 어수선했던 수납공간들을 정리하는 수고를 했다.


나는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습성을 가진 사람이다. 분명히 어딘가에 고이 잘 모셔두었을 터인데, 왜 찾을 때는 감쪽같이 모습을 숨기고 있는 것일까. 남편이 집에 없을 때 반드시 찾아내야만 한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하나에 집착하면 끝을 보고야마는 마누라의 기질과는 정반대인 남편은, 찾다가 없으면 3분 후엔 신발 신고 사러 나가는 사람이다. 평소에는 느릿하다가도 무언가 필요하다 싶으면 어쩌자고 동작이 빠른 건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년 전부터 부모님 댁을 돌봐드리기 시작하면서 덩달아 나의 집 살림은 조금 허술해지기도 했었다. 신혼 초부터도 그렇게 살림살이가 깔끔한 편은 아니었지만, 요즘은 그야말로 간신히 밥상만 차리고 살 정도다. 아직 나타나지 않은 모종삽을 찾는다는 핑계김에 방치해 두었던 수납공간들을 새롭게 정비하고 나니 집안이 한결 산뜻해진 기분이 들었다. 세상만사 그래서 일장일단이 있는 거라고 하나보다.


주방 옆에 팬트리 수납장은 사철 문이 닫혀있는 공간이다. 주방용품과 생필품들이 들어있는 곳에 설마 모종삽을 넣어둘 리가 만무라고 생각했었다. 남편 오기 전에 다이소에 뛰어가서 모종삽 하나 사다 놓아야 하나 자포자기 심정에 이르렀을 때, 모종삽의 케이스가 번쩍 눈에 들어왔다. 얌전하게 반으로 접혀있었으나 갈색 커버 속에 모종삽이 들어있는 게 확실했다. 이게 뭐라고, 할렐루야~다.


저녁에 퇴근하는 남편에게 "집에 있잖아요~"라고 당당하게 모종삽을 내밀 수 있어서 그랬던 것일까, 아니면 빗방울이 오락가락하는 날씨에 다이소에 뛰어가지 않아도 돼서 그랬던 것일까. 어찌 됐든 오늘 모종삽 사는 데 허튼 돈을 들이지 않게 되어서 무척 기뻤다. 돈을 안 쓰고 누리는 기쁨이라니~ 내게는 이런 것이 경제적인 즐거움이지만, 남편은 경제적인 즐거움이란 돈을 좀 쓰고 나서 얻게 되는 기쁨일 거라고 설명할 것이 자명하다.


많은 사람들이 적절한 소비를 통해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우리 집에는 적절한 소비를 하는 세 명의 남자가 있으므로 나머지 여자 한 명쯤 소비를 무서워한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되진 않을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좋은 옷 안 입고 안 써서 저축한 돈을 아들에게 더 많이 주고 싶은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나도 늙은 부모님 입에 맛있는 거 한번 더 사드리고, 예쁜 옷 하나 더 사드리는 정도의 소비는 기꺼이 할 줄 아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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