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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Jul 24. 2024

꼴값이냐 자유냐

아는 언니의 이야기다. 정년퇴직을 한 그녀의 남편은 젊어서부터 낭만적인 데가 많았다. 훤칠한 키에 우수 어린 눈망울로 그가 기타를 연주하며 팝송을 한 자락 뽑아내기라도 하면, 그의 주변에 있던 모든 여자들이 깜빡 죽곤 했었다. 그녀도 그런 그의 모습에 반해 사랑에 빠졌고 다른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당당히 그의 아내 자리를 거머쥐었다.


모 기업에서 정년퇴직을 한 그녀의 남편이 외벌이를 하는 동안, 그녀는 딸 둘과 아들 하나를 훌륭히 키워내면서 짬짬이 시급제 알바를 하여 아이들 학원비를 보탰다. 그녀도 엄연히 여대 출신의 먹고살만한 집의 귀한 딸이었던 시절이 있었으나, 그녀의 사고는 갇혀있지 않았다. 아이들이 장성하여 각자의 생활을 꾸려가고 있고 남편의 퇴직금과 연금이 있다지만, 그녀는 집에서 마냥 놀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평생을 가족들 위해서 일만 하다가 퇴직한 남편이 고마워서, 그녀는 몇 해 전에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서 삼교대로 근무를 하고 있다.


삼 교대 근무 시간 때문에 남편의 수면에 방해가 될까 싶어 문간방으로 잠자리를 이동한 그녀가 어느 날 안방문을 열었을 때, 남편은 영어 강사와 화상 통화를 하며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한국말로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영어 강사는 그녀의 딸보다 한 살 많은 싱글 여성이었다. 딸들은 그녀에게 이혼을 종용하였지만, 그녀는 이혼에 대한 결정을 여전히 내리지 못하고 있다.


퇴직을 했거나 퇴직을 앞두고 있는 남자들의 대다수는 남아도는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가 가장 큰 고민거리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새롭게 취미 생활을 시작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기존에 가입되어 있던 모임에서 탈퇴하는 사람도 있다. 기존에 있던 모임들을 정리하는 경우는 구태여 만남을 지속할 의미가 없다고 판단된 까닭도 있겠지만, 연금에 의지하면서 기존 시스템을 변함없이 작동시키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여전히 추구하는 건 동일하다. "재밌는 거~" 재미를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은 잘못된 것이 아니지만,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서 재미를 구하는 과정에서는 언제나 어떤 형태로든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자연은 인간을 그렇게 만들어서 내보냈으므로, 그 모든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산책길에 가끔 우연히 만나게 되는 다람쥐는 언제나 혼자였다. 두꺼비, , 왜가리, 사마귀, 나비 등각각 혼자 다녔다. 무리를 지어 다니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철새 떼와 개미떼 정도였던 것 같다. 그런데 이 모든 동물들이 자연에서 혼자 돌아다니는 걸 볼 때마다 내 옆에는 늘 남편이 함께  있었다.


나는 지금도 주말마다 남편과 산책을 다닌다. 그런데 이 남편이란 사람이 작년부터 생판 모르는 영역의 사람들과 어울리기 시작하더니 올 해는 대놓고 새로운 스타일로 생활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생소한 영역에 남편을 집어넣은 장본인은 나였다. 그러더니만 급기야 평생 클래식을 듣지도 않던 사람이 무슨 연주회를 쫓아다니는가 하면, 50대 후반 남자들의 로망인 40대 여성의 춤 공연에 가서 버젓이 사진을 찍고 오지를 않나, 암튼 시쳇말로 요즘 우리 남편은 '꼴값'을 하고 다닌다.


하지만 남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것은 꼴값이 아니라 인간의 지극히 기본적인 자유에 해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명색이 회장인데 자기네 모임의 40대 여성 멤버 춤 공연에 아니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마누라에게 말해봤자 좋은 소리는 못 들을 거 같고, 적당히 거래처 사장과 약속 있다고 둘러대고 나갈 수밖에 없던 그 남자의 딱한 사정도 헤아려볼 필요는 있을 것도 같다. 으음... (철학을 공부한 자로서 진리에 근거하여 헤아려 보는 중이다.)


철학을 공부했든 아니했든, 인간을 정의하는 명제는 이러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자유다, 인간은 평등하다.> 어찌 보면 인간의 자유와 평등성을 파괴시킨 것들 중에 하나는 '1:1 결혼 제도'인지도 모른다. 원초적으로 자유롭게 빚어진 인간을 결혼 제도로서 구속시켜 놨으니, 이게 논리적 모순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마음 가는 가는 거고, 가면서 교환의 법칙이 성립되는 걸 어찌하랴.


결혼 제도가 법률적으로 행세하는 사회에서는, 결혼 제도를 벗어난 남녀 간에 '교환의 법칙'이 전개되기 전에 서둘러 단속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 엄밀히 말하자면 남자의 '인정 욕구'는 성욕에 기반한 것이 맞는 것도 같다. 여성의 '인정 욕구'도 비슷한 구석이 없진 않겠지만, 기본적으로 남녀 신체의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욕구의 잉태와 발현 지점이 다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나이 들어가면서 온갖 잡다함을 '유'라는 단어 하나로 퉁 치고 들어가려는 남자와, 갑자기 허리가 아파서 돌아눕지도 못하는 갱년기 여자의 눈에 남자의 자유가 '꼴값'으로 보이는 기이한 차이를 나는 도저히 철학적으로 분석할 짬밥이 못 되는 것 같다. 날은 푹푹 찌는데 늙은 부모님은 허리가 아파서 일어나기도 힘든 막내딸에게 왜 오지 않느냐고 전화를 걸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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