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18 / 7박 9일 (미국 서부 #1)
경외감(Awe), 어떤 대상이나 현상이 자신의 이해 범위를 초월할 때 경험하게 되는 복합적인 감정 '존경심+놀라움+두려움'
동아시아에서는 십간(十干 / 갑, 을, 병, 정, 무, 기, 경, 신, 임, 계)과 십이지(十二支 / 자, 축, 인, 묘, 진, 사, 오, 미, 신, 유, 술, 해)를 조합하여 60개의 간지(干支)를 만들어 시간과 연도를 계산한다. 환갑(60세)은 60년 만에 육십갑자가 다시 돌아왔다는 의미로, 본인이 태어난 해와 같은 간지의 해가 돌아왔다는 뜻이다.
회사에서는 복지의 일환으로, 직원의 부모님이 60세가 도래하면 부모님 몫의 비즈니스석을 제공해준다. (총 4매, 배우자 부모 포함 1매/인) 엄마는 1965년생으로 올해 환갑을 맞이했다. 엄마가 삶에서 한 번의 완전한 사이클을 무사히 완주해낸 것을 축하하기 위해, 이번 여행을 결심했다.
미국 서부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부모님들 반응은 시큰둥했다. 엄마는 미국의 치안을 걱정했고, 아빠는 '하와이가 좋다더라', 어머님은 '스위스가 좋다더라' 아쉬운 속내를 슬쩍 비추셨다. 동남아시아나 중국 여행만 다녀본 부모님들은 어떤 경이로운 자연과 거대한 도시를 마주할지 꿈에도 모른채, 일말의 기대감 없이, 우리의 여행길을 따라 나섰다.
나는 미국 방문이 네 번째이고, 지은 죄도 없는데 미국 입국심사는 왠지 모르게 항상 긴장된다. 네이티브와의 영어라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입국 심사관은 넷플릭스로 한국 컨텐츠를 많이 본다는 인사말을 건냈고, 그의 유쾌함 덕분에 힘이 잔뜩 들어갔던 승모근이 단숨에 풀어졌다.
우버를 타고 호텔로 이동하는데, 차 안을 가득 채운 팝송과 창밖의 큼지막한 건물들이 미국에 왔음을 실감케 했다. 우버는 팁이 의무가 아니지만, 기분좋게 15%의 팁을 지불했는데, 우버기사가 인원 추가금을 더 떼갔다는 걸 너무 늦게 발견했다. XL 차량이기 때문에 더 비싼 요금을 지불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원 추가금을 떼간 것은 불합리하다며 나는 방방 뛰었다. 남편은 몇 만원 때문에 기분 상해하지말라고 나를 다독였지만, 12만원이나 썼다고 하니, 팁을 괜히 줬다며 남편도 함께 방방 뛰었다.
내 친구 지운이는 나보다 한 달 앞서 라스베이거스 여행을 다녀왔다. 홀슈스 라스베이거스 호텔 뷰를 찍어보냈는데, 이 뷰를 기대하며 같은 호텔을 예약했다. 하지만, 우리는 에어컨 실외기 뷰였다. 인종차별을 당했나 싶었는데, 알고보니 '하이롤러 뷰' 옵션으로 예약해야 했다.
숙소에 짐만 내려놓고 간단하게 저녁을 해결하기로 했다. 돈코츠 라멘과 돈부리(소고기)를 한참 맛있게 먹고 있는데, 어떤 손님이 내가 주문한 메뉴가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했다. 아시안 식당에서 아시안의 메뉴 선택은 실패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초면에 말을 걸 정도로 맛있어 보였을까, 왠지 모를 뿌듯함이 밀려왔다.
좌석 착석부터~음식 주문~계산까지 '기다림'의 서양 문화는 한국에서 60년 넘게 빨리빨리 살아온 부모님들에겐 익숙치 않았고, 나는 부모님들에게 가정교육 시키듯 에티켓을 하나하나 입력시키기 시작했다. 종업원이 기다리던 영수증을 가져다주었고, 아빠는 택시비 이후로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는데, 미국 물가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숙소 : 홀스슈 라스베이거스 호텔 & 카지노 (Link) / 하이롤러뷰 예약 필수
식당 : 라멘 카타나야 (Link) / 돈코츠 라멘, 돈부리(Beef) 추천
라스베이거스의 밤은 정말 화려하고, 북적거리고, 시끄러웠다. 각종 코스튬, 버스킹, 대마 냄새로 가득찬 이 광란의 도시는 단 몇 시간 만에 나와 남편의 기를 모두 앗아갔다. 하지만, 부모님들은 화려한 네온사인에 매료되어 눈과 발이 바빴다. 아빠는 눈이 즐겁다며 열심히 두리번거렸다. 미국의 치안을 걱정했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엄마는 수많은 인파를 뚫으며 거침없이 앞장서서 걸었고, 어머님은 엄마만 따라다니셨다.
군중에 휩쓸려 빨간불에도 횡단보도를 건너려는 엄마들에게 건너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고, 횡단보도 신호 보는 방법마저 알려드려야 했다. 나는 행여나 부모님들을 잃어버릴까봐, 사고가 날 까봐 잔뜩 신경이 예민해졌다. 어린 시절 우리를 놀이동산에, 바다에, 계곡에 데려갔을 때, 부모님들도 이런 마음이었겠지 싶기도 했다.
라스베이거스 길거리에서, 벨라지오 분수에서, 카지노에서 열심히 부모님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밤늦게 숙소에 올라와서 남편은 짐보관 서비스를 미리 확인하자고 했지만, 나는 피곤하다며 씻고 침대에 누웠다. 막상 침대에 누우니, 잠이 안와 휴대폰을 만졌다. 새벽 1시쯤, 투어 전날에 호텔에 꼭 짐을 미리 맡기라는 안내사항을 발견하고, 갑자기 걱정이 밀려들어 벨 데스크 운영시간을 확인하러 내려갔다 왔다. 나 홀로 잠 못 이룬 여행 첫날이었다.
장소 : 벨라지오 분수 (Link)
홀스슈 호텔은 짐보관 서비스가 무료지만(리조트 Fee에 포함), 벨 데스크 직원에게 팁을 준다. 캐리어를 4개나 맡기는데, 얼마의 팁이 적정한지 몰라서 직원에게 물어보니 $10를 달라고 했다. 짐이 무사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20을 건넸다. 직원의 잇몸 만개 웃음으로 우리의 짐은 무조건 안전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고,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그랜드캐년 1박 2일 투어를 시작했다.
가이드님의 일목요연한 설명을 듣고, 차에 타라고 하면 타고, 졸리면 자고, 차에서 내리라고 하면 내리고, 밥을 먹으라고 하면 먹고, 화장실을 가라고 하면 가고, 구경하라고 하면 구경하고, 사진 포즈를 취하라고 하면 포즈를 취했다.
이번 여행 뿐만 아니라 내 인생 통틀어 목표를 위한 철저한 계획도, 무엇인가를 얻기 위한 노력도, 최선의 선택에 대한 고민도, 결과에 대한 걱정도 필요 없는 순간이 있었던가! 돈이 좋구나 싶었다.
부모님들은 기대도, 상상도 해 본적 없던 광활한 자연을 처음 마주하고 큰 감동을 받은 듯 했다. 특히, 브라이스 캐년에서는 비가 제법 내렸는데도, 세 분이서 제한시간을 꽉 채워 구석구석 돌아보시고 차로 돌아오셨다. 하루의 여운이 길게 남아서 그랬을까, 저녁 삼겹살 파티에서 아빠는 한껏 들뜬 목소리로 초면인 투어 일행들에게 본인 딸 자랑을 늘어 놓았고, 나는 그만 하라며 성질을 부렸다. 아빠의 너스레 덕분에 투어 일행들과 어색할 뻔한 저녁식사가 즐겁게 끝났고, 가이드님은 내일이 더 좋을 것이라며 기대감을 잔뜩 심어주었다. 부모님들과 남편은 모닥불에 마시멜로도 구워먹고, 별까지 야무지게 봤다고 한다. 나 홀로 일찍 잠 든 여행 둘째 날이었다.
장소 : 자이언 캐년 (Link)
장소 : 브라이스 캐년 (Link)
일출 직후 은근히 고운색의 하늘을 품은 파웰호수에서 하루를 시작했다. 홀슈스 벤드에서는 인간을 한낱 개미로 만들어버리는 거대한 바위산과 함께 신나게 사진을 찍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진 속 '나'는 '주인공', '자연'은 철저히 '배경'이었고, 우리는 사진 남기기에 급급했다.
그런데 앤텔로프 캐년과 그랜드 캐년은 사뭇 달랐다. 앤텔로프 캐년의 신비로움은 철저히 주인공이 되어 우리들의 카메라 세례를 받았다. 몇 백만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웅장한 그랜드 캐년은 우리를 압도하며, 저절로 경건한 마음이 들게 했다. 아무리 찍어도 사진에 담기지 않는 초월적 경관은 우리로 하여금 카메라를 내려 놓고 눈에 담도록 했다.
1박 2일 동안 6대 캐년을 방문했는데, 부모님들은 각 캐년의 이름도 모른채 투어가 끝났다. 이 투어 만큼은 남편과 내가 돈을 아끼지 않았는데, 6가지의 캐년이 '그랜드 캐년' 하나로 퉁쳐져서 부모님들께 기억되는 것이 조금 억울했다.
심지어 어느 캐년이 제일 좋았냐는 투어 가이드의 질문에 '사돈이랑 같은 생각이다.'라고 대답하신 어머님을 보며, 한국에 돌아가서 지인들에게 그랜드 캐년을 미국의 '어떤 산'쯤으로 소개하실 것 같아 아찔했다. 이때부터 우리가 미국 어느 도시에 머물렀는지, 투어 이름이 무엇인지, 사진과 매치하는 캐년 이름이 무엇인지, 부모님들을 향한 나의 퀴즈가 매일 시작되었다.
장소 : 파웰호수 전망대 (Link)
장소 : 홀슈스 벤드 (Link)
장소 : 앤텔로프 캐년 (Link)
장소 : 그랜드 캐년 사우스림 & 이스트림 (Link)
렌트카를 4일차부터 빌릴까 고민하다가, 버스를 타고 돌아다니기로 결정했다. RTC 버스 티켓은 24시간 이용시 인당 $8로 가격도 합리적이다. 오전엔 남편이 가고 싶어했던 코카콜라 스토어를 구경했다. 패키지 여행에 익숙한 부모님들에게는 여행이란 자고로 쉴새없이 관광과 사진으로 가득 차야 하는 법. 스토어 구경에 대한 부모님 반응은 영 심드렁했다. 눈치를 보던 남편은 과일을 사러 가자고 제안했다. 마켓에 가니 부모님들의 눈빛에 조금 생기가 생겼다.
오후에는 스피어 공연 관람이 계획되어 있었다. 부모님들은 또 심심한 표정으로 우리를 총총 따라왔다. 입장 후, 로비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있는 로보트, 천장에 주렁주렁 달린 예술 작품을 보며, 아빠는 이거 보러 여기 왔나며 코웃음을 쳤다. 나는 ‘응~ 이거 보러 왔어.’라며 ‘0’이었던 아빠의 기대감을 ‘마이너스’로 만들었다. 역시나 내가 열심히 만들어줬던 가이드북은 무용지물이었다.
공연은 거대한 지구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듯한 연출로 시작됐다. 네모난 스크린에서 돔 스크린으로 화면이 자연스럽게 전환됐는데, 여기저기서 감탄이 쏟아졌다. 곧 이어 지구 곳곳의 아름다운 모습이 담긴 영상들과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이 파괴되는 모습이 담긴 영상들을 보며 한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엄마는 우리가 전날 봤던 그랜드 캐년이 펼쳐질 때 감동이 밀려왔다고 했다. 아빠는 영상 뿐만 아니라 좌석의 진동 효과도 칭찬했다. 남편과 나는 미국의 자본과 기술력에 다시 한 번 경외감을 느꼈다. 한편으론, 환경 오염에 대한 경각심을 주는 내용과 모순되게, LED 냉각을 위해 엄청난 에너지를 쏟고있는 스피어를 즐긴 죄책감으로 마음이 불편했다.
숙소 : 트레져아이랜드호텔 (Link) / 스피어 접근성 좋음 (베네시안 호텔 맞은 편에 위치)
장소 : 스피어 (Link)
어딜가나 어머님의 소감은 "너무 좋았어", "내가 언제 이런데를 와보니", "고맙다" 세 가지 정도로 마치 돌림노래 같다. 표현력은 경험에 기반한다. 다양한 경험은 자신의 생각, 감정, 그리고 가치관을 형성하고, 이것들은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는 힘이된다. 혼자서 아들 둘을 키웠던 어머님에겐 다양한 경험은 사치였을 테다. 하지만, 이제는 본인에게 조금의 사치가 허용되시는 것 같다. 아울렛에서는 본인을 위한 예쁜 코치 가방을 흔쾌히 구매했다.
프리몬트 스트리트에서 짚라인을 타고 싶다던 아빠는 6만원이라는 가격을 듣곤, 타기 싫다며 금방 마음을 뒤집었다. 간식으로 타코를 샀는데, 그 가게에서는 시끄러운 음악소리 때문에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길거리에서 빠르게 대충 입에 털어 넣고, 기념사진을 찍은 후 숙소로 돌아왔다. 이 날은 무척 덥고 많이 걸어 힘들었는데, 이 힘듦 마저 부모님들께 좋은 경험이고 추억이 됐길 바란다.
하루하루 입이 떡 벌어지는 경험을 했던 아빠는 새로운 세상을 봤다고 한다. "효도 제대로 하네"라고 말하는 아빠에게 키워준 은혜는 이걸로 퉁치자고 제안했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부모님들이 너무 늙지 않으셨을 때, 건강하실 때, 이 넓은 세상을 보여드릴 수 있는 기회가 나에게 와줘서 감사했다.
장소 : 시내구경 (허쉬 스토어, M&M 스토어, 코카콜라 스토어, 베네시안 호텔 등)
장소 : 라스베가스 노스 프리미엄 아울렛 (Link) & 프리몬트 스트리트 (Link)
지운아 하리롤러&스피어 전망 사진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