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

이혼을 앞둔 친구에게 위로를 건네는 일은 분리수거 만큼 피곤한 일이다

by 단호박

"그러니까..뭐라고?"

"그녀와 헤어질거야."


H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애들은?"

"내가 데려오기로 대충 얘기를 끝냈어"

"쉽게 포기하려고 하던가?"

"포기 못할건 또 없잖나?"

"하긴.."


잘못내린 싸구려 커피 마냥 역한 타르맛이 혀 끝에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내 기억에 그녀는 책임감이 없는 여성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근 몇년 사이에 그녀가 애들을 내버려두고 게임에 매진한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리고 그녀를 그리로 몰아부친 것은 H였다. 하지만, H는 내 친구였고, 그녀는 내 친구가 아니었다. 내 의견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비결은 옳고 그름에 대한 선을 관계에 유리하게 해석하는 것이니까.


"누가 먼저 말을 꺼냈냐?" 내가 물었다.

"그녀가. 아니, 내가"

"무슨뜻이냐?"

"정확히는 그녀가 먼저 말을 꺼내긴 했는데, 내가 그걸 받아들인셈이지."

"하긴 그게 뭐가 중요하겠냐. 중요한건 결정을 내렸다는거지."

"맞다. 그렇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말들을 머릿속에 늘어놓고, 해야만 하는 말들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개중에 가장 그럴싸해보이는 말을 하나 골라서 얌전히 그에게 건넸다.


"그래, 그게 네 선택이라면, 나는 네 선택을 존중한다."


내 말에 H는 별다른 반응 없이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의 마음 속 에서는 내 말보다도 더 빠르게 복잡한 생각들이 저마다 목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는 시선을 천장 모서리에 고정한 채로 말했다.


"왜 그랬을까?"

"뭐가?"

"왜 그랬을까?"


아마 그는 나와 얘기하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누군가와 얘기하는 건 필요했다. 혼잣말과는 다르다. 어떤 감정들은 얌전히 가슴속에 담아두기란 거의 불가능하니까. 그런 감정들은 억지로 가슴속에 붙잡아 두려고 하면, 이성을 잃은 경주마처럼 마구 날뛰다가 결국은 자기 자신을 상처입힌다. 나는 무덤덤하게 그에게 말했다.


"그러게." 그는 잠시 침묵 속에 있다가 내뱉듯 말했다.

"내가 제일 궁금한 건, 그거야. 자기 애들 이잖아. 동물도 자기 애들은 소중히 여기는데."


그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하지만, 그가 틀렸다. 누구나 모성애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게의 경우엔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 종도 존재한다. 모성애는 인간의 발명품이라는 개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종족 번식 본능에 기반해 우리 유전자에 각인된 행동을 기반으로 타인을 재단해선 안된다. 하지만, 그는 그런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저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혹은 그녀를 헤어져도 되는 나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려고 하거나.


"모든 사람이 모성애를 가지고 행동하는 건 아니잖나, 어떤 사람은 다른 모든 것 보다도 자기 자신을 우선시 하는거지."

그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녀를 붙잡아보려고 하지 않았나?"

"했지. 그녀가 갈라서자고 말을 꺼냈을 때, 제일 기분 나빴던 건 그 말을 듣고 내 마음속에서 어딘가 기쁜 감정이 솟구쳤다는 거야. 하지만, 다시 한번 붙잡았어. 너무 애절하게는 말고 표면적으로 말야, 아마 그녀도 내 그런 태도를 느꼈는지도 모르지."

"그게 나쁜 건 아니지. 관계에서 개새끼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 어딨겠나."

"맞아. 바로 그거야. 착한아이 컴플렉스든 뭐든 나는 이혼하자는 말을 들었는데 기뻤고, 그런 감정을 숨길려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그녀에게 했던 것 같애."

"뭐라던가?"

"아무말도!" 그가 소파의 턱걸이를 후려갈기며 말했다;

"아무말도 안하더라. 표정의 변화조차 없었어. 그때 뭔가 느낌이 오더라. 내가 만약 여기서 눈물을 흘리며 매달리더라도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을 거라고 말야. 우리 관계는 2년 전에 머스크 멜론 사건 때부터 이미 끝났던 거였어."

"아아.. 그 냉장고 사건."

"우리 관계는 그때 이미 죽었고, 우리는 죽은 관계를 죽지 않은 척 하면서 지내왔던 것 같애.

애들이 제일 불쌍하지. 애들은 바보가 아니야. 죽은 관계를 죽지 않은 척 짐짓 꾸며내도 애들은 귀신같이 눈치를 채거든."

"애들은 부모의 감정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공감능력이 엄청나게 뛰어나기 때문에 그런걸 애들에게 숨겨내기란 정말 쉽지 않지."

"내 말이 그거야."

"그래서 뭐라고 했나?"

"내가 그런 감정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 갑자기 네가 했던 말이 떠오르더라"

"내가 뭐라고 했길래?" 나는 그에게 되물었다.

"그때 네가 나더러 행복해 질 권리가 있다고 했잖나?" 그러고보니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은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아마 6~7개월 쯤 전에 그가 그녀의 어깨를 매만졌을 때, 그녀가 그 손을 매몰차게 치워버려서 싸웠던 때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계속 그 말을 주문처럼 되뇌었던 것 같애. 나는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나는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나는 속으로 '하지만 그게 너희 애들을 불행하게 만들 이유는 안될텐데' 라고 생각했지만, 결별에 참담함을 느끼는 당사자에게 그런 말을 입 밖에 내뱉을 이유는 없었다. 나는 말을 고르고 골라 적당하게 맞장구 쳤다.

"잘 생각했다."


그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 외에는 별달리 떠오른 말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이런 말을 고르는 일이 너무나 피곤하게 느껴졌다. 사실 모든 문제의 시발은 내 친구가 만들고 다듬고 발전시켜왔다. 그가 이 모든 관계의 책임을 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책임을 축소하고, 감출려고만 하고 있었다. 그게 잘못됐다는 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그처럼 비겁하니까. 하지만, 친구라는 명목하에 자꾸 상처 입은 앞 발을 핥아대려고 하는 고라니 같은 친구에게 다정하게 다가가서 '나는 널 해치지 않아. 나는 너의 친구란다' 라는 것을 끊임없이 되뇌이는 일은 정말로 피곤한 일이었다. 무더기로 섞여있는 분리수거 용품을 하나하나 골라내서 분리수거 하는 과정처럼 말이다. 그리고 나는 분리수거가 정말 하기 싫은 사람이다. 쓸데없는 침묵을 견뎌내기 힘들어져서 나는 아무 말이나 대충 골라서 내뱉었다.


"어떻게 보자면 그녀에게도 잘된거야. 새로운 남자를 만날 수 있을테니"

"혹은 여자일지도."

"그래 여자일 수도 있지. 그게 차라리 나을수도 있지." 친구는 찡그린건지 웃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의 애쓰는 모습을 참기 힘들어서 물었다.

"애들한테는 얘기했냐?"

"아니, 이제 하러가야지."

"제일 힘든 순간이 남아있구만."

"아아 그렇지."

"누가 이야기 하기로 했냐."

"일단 같이 이야기하기로 했다.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실수나 문제로 헤어진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줘야 하니까."

"쉽지 않구만."

"그래, 쉽지 않구만. 하지만" 그는 탁자 위에 놓인 휴대폰과 차 키를 챙기며 말했다.

"...그게 사는거겠지."

"그래 그게 사는거지. 가보려고?"

"슬슬 들어가야지."

"아이스크림이나 케이크 같은걸 사가는게 어떠냐?"

"아이스크림?"

"어느 연구결과에 나왔는데 슬프거나 고통스러운 경험을 겪기 전에 달콤한 걸 먹으면, 고통이 덜 힘든 것 처럼 느껴지게 된다더라. 한 5% 쯤."

"아아, 그건 좋은 생각이군."

"그래 힘내고, 잘 마무리 지어라."


우리는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다. 나는 차 시동을 걸고 그가 내 시야에서 보이지 않을 때 까지 배웅해주었다.

그에게는 삶의 커다란 하나의 장이 끝났고, 내게 있어서는 힘든 분리수거가 끝이났다. 나는 그가 스스로 되뇌이는 것 처럼 그가 행복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하지만, 삶은 우리 맘처럼 흘러가지 않을 것이고, 그게 바로 삶 아닌가. 어쩔 도리 없지만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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