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IMF
우리 엄마 아빠의 그 많았던 부부 싸움 중
이민을 결심한 날의 싸움이 언제였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엄마의 얘기에 의하면 그날도 “할머니”였다.
엄마한테 사 준 밍크코트와 은여우 목도리가 발단이었다.
할머니는 특유의 비꼼으로 엄마의 속을 뒤집어 놨고
아무리 여장부라도 당시 풍속 상 시어머니에게 바로 따지고 드는 건
동방예의지국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엄마 입장에서는 이 모든 일의 화근인 애먼 아빠를 잡았다.
목청이라면 세계 어딜 내놔도 손색이 없는 둘은
그렇게 또 한 번 사즉생의 결기로 싸움을 시작했다.
그렇게 집안이 또 발칵 뒤집어졌다.
그런 싸움에 지칠 대로 지친 아빠는 그날 이민을 결심을 했다고 한다.
그렇다.
이민의 발단은 다른 것도 아닌 밍크코트와 은여우 목도리였다.
그렇게 할머니가 탐내하시던 은여우 목도리는
아마 이민 오면서 할머니를 드렸던 걸로 기억한다.
우여곡절 끝에 캐나다에 도착은 했다.
하지만 나는 바로 학교에 들어갈 수 없었다.
할머니 이슈를 해결하기에 바빴던 아빠는
아빠답지 않게 이주공사에서 하는 얘기를 곧이곧대로 들었다.
“사장님 조건이라면 3개월이면 영주권 나옵니다.
원하시면 캐나다에 먼저 들어가 계셔도 됩니다.”
아빠는 하루빨리 한국 땅을 떠나 “조용히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고 한다.
우리는 영주권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이주공사 얘기만 철석같이 믿고 캐나다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삿짐은 40 피트짜리 컨테이너 한가득을 실어
이미 태평양을 건너고 있었다.
캐나다는 불법 이민 자체가 불가능한 나라다.
제대로 된 거주 자격이 없다면 교육/의료/금융 그 무엇도 할 수가 없다.
고로 네 가족은 여행자 신분이었으므로
여행을 다니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1997년 가을 깨,
우리 세대라면 다 알고 있는 IMF가 터졌다.
아직 우린 영주권을 못 받은 상황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떤 결심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아빠는 그때 정말 혀 깨물고 죽고 싶었다고 한다.
대미 환율도 환율이지만 당시 6-700원 하던 캐나다 환율은 1500원까지 치솟았다.
영주권을 받게 되면 가져오려고 했던 재산이 반토막도 안되게 줄어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재산이 문제가 아니었다.
당장 영주권이 언제 나올지도 불투명한 상황이 돼버렸다.
해를 넘겨 1998년이 되고
영주권 소식은 더 묘연해졌다.
이주공사도 IMF 핑계만 델뿐이었다.
아빠는 엄마에게 애들 잘 보고 있으라고 하고
직접 일을 해결해 보겠다고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공항으로 떠나는 아빠를 보며
한국 전쟁이 났을 때
가장들이 전쟁통에 가족 먹여 살리겠다고 집 밖으로 갔다가
가족한테 영영 못 돌아왔다고 하는 흔한 스토리가 떠올랐다.
주한 캐나다 대사관에서 아빠는
당시 남들 한 번만 해도 살 떨린다는 영주권 인터뷰를 2번이나 했다고 했다.
한국에 있는 재산이 이제 캐나다 달러로 반도 안되니
심사를 다시 처음부터 해야겠다는 심사관에게
지금 영주권 신청서에 올린 은행 계좌에 정리해 놓은 재산 외
한국 내 부동산과 아직 처리하지 않은 사업 관련 자산 증명을 할 테니
심사를 처음으로 돌리지는 말아 달라 애원이 전부였던 인터뷰였다고 한다.
캐나다에 가서 그 간의 사업 수완으로 캐나다 경제에 큰 이바지를 하겠다는
엉성한 포부를 안 되는 영어로 애닮 게 어필했다고 한다.
아빠가 세상 태어나서 그런 굴욕은 없었단다.
무슨 일이었는지 심사관 그 두 번째 인터뷰에서
우리 네 식구의 영주권을 발급해 줬다.
아빠의 애절함이 통했던 건지,
정말 신이 도왔던 건지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그렇게 신은 IMF로 싸대기를 날리더니 영주권으로 연고를 발라줬다.
그게 1998년 4월에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