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직선 우주

쪼그라 들었어도 의미가 있기를

by 갈휘연

수능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험이며, 가히 수능 성적이 곧 인간의 등급표라고 믿는 아이와 말을 섞게 됐다.

그 아이의 세계관은 놀라울 만큼 단순하고, 동시에 놀라울 만큼 확신에 차 있었다.


내가 꺼낸 말은 그저 나 포함,

“이공계 전공자들도 인문학 책을 읽어 인문학적인 소양을 놓치면 안된다.”는 단순한 메세지였다.


거기에 그 아이의 답은 바로 이랬다.

“수능 국어 성적이 안 좋으면 책을 백 권이든 천 권이든 읽어도 소용없어. 그리고 의대생이 이공계생보다 모든 면에서 월등해.”


어이가 없다 못해 웃겼다.

의대생이 모든 면에서 월등하다는 ‘모든’에는 무엇이 포함될까?

수능으로 매너, 인간성, 심지어 센스까지?


거기에 “수능에서 언어성적 못받는 사람은 책을 읽어도 소용없다”는 말이 킥이다.

그 논리라면, 인생의 모든 자기계발은 수능 성적이 좋았던 사람들만의 전유물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책을 펼치는 순간, ‘네가 뭘 해도 소용없다’는 팝업창이 떠야 한다.

상상만 해도 그 아이의 우주가 너무 웃겼다.


궁금해졌다.

도대체 이 아이는 어디서 이런 세계 지도를 받아들었을까.

그 아이의 세상에는 한 줄기 굵은 길만 그려져 있는 듯 보였다.

초, 중, 고등학교 , 수능, 의대, 전문의, 그리고 인생 완성?

옆길, 뒷길, 산길, 바닷길 따위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심지어 ‘길’이 아니라 ‘인생’의 다른 형태는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


그나마 내가 본 게 다라면 최상의 시나리오는 그 아이의 집이 그래도 좀 살아서

의대 보낼 서포트 정도는 하는 정도로 먹고 사는 집 애일 것이라는 가정.

그렇다면 그 아이의 한 길로 쪼그라든 우주는 아이의 가정과 학교와 사회가 합작해 만든 결과물일 것이다.

그 아이의 부모는 아이에게 ‘좋은 대학, 좋은 직업’을 끊임없이 주입시켰을 것이고

그렇게 학교는 ‘좋은 대학’을 위한 모의고사 훈련소가 됐을 것이다.

엘리트 주의 사회는 그 틀을 강화한다.

그러다 보니, 수능은 그 아이에게 진로를 가르는 시험을 넘어, 인생의 종합 성적표가 된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시험은 능력의 일부를 측정할 뿐이다.

하지만 그 일부가 전부가 되는 순간, 세상은 한 줄로 좁혀져 버린다.

더 웃긴 건, 이렇게 불운한 한 개인의 우주가 쪼그라 들던 말던 세상은 세상데로 그들의 망상과는 상관 없이 가차없이 1+1=2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대학 입학 이후, 실제 사회에서는 성적표보다 ‘말빨’, ‘관계’, ‘실무 능력’, ‘운’ 같은 변수가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나 이런 현실을 수능시험 준비과정은 결코 가르쳐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게임의 룰을 유지하는 데 ‘수능=전부’라는 신화만큼 강력한 도구가 없기 때문이다.


그 아이와 길게 대화를 이어가진 않았다.

어떻게 반응하는 지가 궁금해서 추임새만 좀 넣어봤다.

논리로 싸우면 내가 이길 수야 있겠지만, 이긴들 뭐하나.

그 아이는 ‘정답이 하나뿐인 시험’에 길들여져 있는데.

보기 5번에도 들어가지 않으니, 어쩌면 “눈앞에 알아 있는 논리“ 따위는 선택지에서 자동 탈락이다. 큭.


그리고 짓게 된 웃음이 너무 쓰다.

이 씁쓸한 웃음은 고개를 돌려 안보려고 해도 자꾸 보이는 한국 교육의 괴기함을 또 목도 했음이다.

그 교육이 길러낸 세계관 속에서, 책은 성적을 높이는 도구일 때만 의미가 있고, 직업의 서열은 의대가 가장 위에 있어야 안심이 된다.


그 빠그러진 우주가 좀 안타깝다.

어쩌면 그 아이의 빠그러진 우주는 그 아이 잘못이 아니라, 그 아이에게 ‘다른 길’을 보여주지 않은 어른들에게 책임이 있다.

어쨋거나 그 아이는 그 아이의 부모가 책임을 지겠지.


나는 내 애들이나 제대로 키워야지 또 만트라를 외운다.

적어도 나는 읽는 사람을 공명시키는 깊이 있는 책 몇권이 수능 성적보다 훨씬 더 멀리, 깊이, 오래 스스로 굳건히 살 수 있는 힘 만들어 낸다고 믿고 그렇게 가르친다.

‘시험 정답’으로 정작 삶의 답을 낼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알지브라 좀 안다고 리만 가설을 증명할 수 있을리 없지 않겠는가.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