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위한 영어 유치원

영혼의 뼈대를 미국산으로

by 갈휘연

한국에서 “영유”, ‘영어 유치원’은 이미 하나의 거대한 산업이자 부모들의 불안 심리를 먹고 자라는 비즈니스 모델이 됐다.

영유(영어 유치원)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대다수 부모는 무리를 해서라도 내 아이를 보내서 “오렌지”를 “어륀쥐”라고 제대로 발음할 수 있는 “원어민 영어구사 가능자”로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을 대면한다.

그 기저에는 영어를 조기 교육하면 글로벌 시대에서 앞서 나갈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을 것이다.


나는 이 흐름이 불편하다.

단순히 영어 자체가 불필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짚고 싶은 건 언어를 배우는 시기와 방식, 그리고 그 과정이 아이의 ‘언어 발달과 사고력 형성’에 미치는 영향, 거기에 덧붙여 세상이 돌아가는 판의 모양새다.


호모 사피엔스에게 언어란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이 아니다. 언어는 사고의 틀을 만드는 ‘영혼의 골격구조’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세상을 인식하고, 개념을 만들고, 생각을 조립한다.

그렇기에 한 인간이 메인으로 쓰는 언어의 깊이가 곧 사고의 깊이로 이어진다.

아이가 아직 모국어도 엉성할 유치원 시절부터 하루 종일 영어 환경에 아이를 몰아넣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이의 인지 발달 핵심 시기에, 자기 감정과 생각을 모국어로 충분히 표현하고 다듬을 시간과 기회는 어떻게 될까?


이중언어 습득이 무조건 긍정적이라는 통념도 재검토가 필요하다. 다수의 연구에서 멀티링구얼(다중언어 사용자)이 모노링구얼(단일언어 사용자)보다 더 많은 뇌 인지 영역을 활성화한다는 결과가 있긴 하다. 한 사물이나 개념을 두고 복수의 단어를 습득해야하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이것이 곧 ‘더 깊이 있는 언어 사고’를 보장한다는 뜻은 아니다.

언어는 표면적 유창성보다 개념적 정밀함과 논리적 연결이 더 중요하다. 두세 개의 언어를 얕게 아는 것보다, 한 언어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것이 어쩌면 사고력과 창의성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더욱이 요즘은 하루가 멀다하고 AI가 다음 세대로 발전하는 시대.

AI 번역 기술은 이미 실시간 통역 수준에 근접해 있으며, 앞으로 언어 장벽은 거의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이때 경쟁력은 영어 단어를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사고하고 사유하며 비판적으로 세상을 읽을 줄 아는 사람에게 돌아간다. AI가 언어의 장벽을 무너뜨려도, ‘깊이 있는 사유의 장벽’을 무너뜨리기 쉽지 않을 것이다.

깊이있는 사유와 통찰, 공감은 AI로 대체될 마지막 인간 고유의 영역일 것이다.


그렇다면 부모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영어를 조기 교육하느라 돈과 시간을 갈아 넣는 대신, 아이가이미 부모에게 물려받은 모국어로 생각을 깊이 있게 하고 다양한 관점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우선 아닐까?

일상을 나누고 대화하며, 질문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언어는 단단해지고 사고는 확장된다.


학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일본인 노교수가 강단에 섰다.

저명한 저널에 그 노교수의 엄청난 논문이 퍼블리싱 되고 난 후 첫 학회였다.

그는 프리젠테이션은 거의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논문은 영어로 쓰여졌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학술적 영어.

그 노교수는 평생을 일본에서 수학하고 연구하신 분으로 “원어민 영어 구사 기능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보통은 프리젠테이션이 끝나고 손을 들고 질문을 하는 게 보통이지만 워낙 큰 학회이기도 하고 그 프리젠테이션은 질문자가 많기도, 오디토리움이 크기도 하여 중앙복도에 마이크로 하나 놓고 질문할 사람들이 그 뒤로 줄을 서도록 했다.

논문의 엄청난 임펙트에 걸맞게 엄청난 줄이 이어졌다.

노교수가 영어를 할 줄 알던 모르던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 노교수의 엄청난 연구 결과에 대해 질문자들은 어떻게든 각자의 질문을 이해시켜 필요한 답을 얻느라 혈안이 되었다.

그 교수가 가지고 있는 엄청난 연구결과를 두고 그의 영어를 타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간의 언어는 소통하는 것을 가장 큰 목표로 한다.

얕은 정보의 유통, 혹은 생각 뿐 아니라 깊은 사유를 서로 나누고 공유함으로써 사회가 긍정적으로 유지되고 발전한다. 또한 나는 한글체계를 가지고 있는 한국어만큼 사고를 확장하는 데 효율적인 언어가 없다는 데 깊은 믿음이 있다.

모국어의 기반이 튼튼해야 외국어 습득도 더 빠르고 깊어진다. 실제로 많은 언어학자들은 모국어가 충분히 발달한 이후 배우는 외국어가 더 정교하고 정확하게 습득된다고 지적한다.


언어는 도구이지만, 사고는 무기다.

도구는 시대에 따라 바뀌지만, 무기는 평생 간다.

영어 유치원이 만들어주는 것은 도구일 뿐, 무기를 만들어주지 않는다.


AI 시대를 살아갈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원어민 발음’이 아니라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