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김미 쪼꼬렛뜨

이제 쪼꼬렛 안먹어요.

by 갈휘연

20세기 초,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다.

36년간 주권, 자원, 국민들은 수탈을 당했고 겨우 독립을 이루고나니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

그로부터 3년간 온 나라가 쑥대밭에 됐다.

그랬던 최후진국이 정전 35년만에 올림픽을 치루는 나라로 발돋움하고 곧이어 OECD에 가입하고 일본을 GDP로 누르고 현재, 온 세상은 K-culture가 휘몰아치고 있다.

그걸 가능하게 했던 기초를 다진 세대가 40-60년대생들이다.


지금의 60대에서 80대 장년들이 호모 사피엔스 역사상 단 한번도 없었던 초단기 경제성장의 기적을 한반도에서 이뤘다. 살과 뼈를 갈았어도 그들은 극도의 효용감을 느끼고 살았다. 본인들이 모든 걸 바쳐 이룩했으나 그 공은 모두 기득권에게 돌렸다. 그들 뇌리에는 여전히 미국은 구원자, 박정희는 독재고 나발이고 경제발전을 이룬 영웅이라는 생각이 각인되어 있다.


물리법칙에 작용 반작용이라는 것이 있다.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성장의 그림자는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말 그대로 경제 성장에 모든 역량을 갈아 넣었다.

거기에 갈아 넣은 것들 중 철학, 윤리, 인류애, 가족애 등 따뜻하고 인간을 인간답게 하지만 돈은 딱히 되지 않는가치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따땃한 것들의 부제가 반작용이 되어 현재 모두의 뒷통수를 치고 있다.


“삶의 가장 우선순위가 가족이 아닌 경제적 풍요인 세계 유일의 나라!”


뭐가 옳은 선택이었는지는 그 발전된 경제 혜택을 받고 사는 나는 판단할 권한이 없다.

어쨋거나 그들의 사회 언어는 어쩌면 “법치”라는 걸 허울로 걸어 놓고 뒤로는 기득권에게 이권이 거의 다 돌아가는 시스템.

원래 받아야 할 돈에 반의 반도 받지 못하며 온갖 위험에 고대로 노출되어 일 했던 그 시절 노동자들에게

그나마 일 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에 감사해야했다고 한다면 백번 양보해서 “그래. 그렇게 볼 수도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그 모든 시간을 넘어 2025년의 한국은 더이상 그런 주먹구구식 정책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사이즈도 체질도 아니다.

세상은 가차없는 +/-로 돌아간다.

경제는 더 얄짤없는 덧셈 뺄셈 경제지표를 베이스로,

더이상은 기득권 독식구조로는 성장이 요원하다고 말한다. 이제 분배에 대해 이야기 해야하며 다 같이 잘사는 세상을 모두를 위해 논해야 한다


하지만 효용감 찬란했던 그 시절을 ‘그림만 비슷하게 만들고 무조건 우겨!‘로 모든 것을 해결했던, 그리고 사회 체질도 그렇게 만들었던 현 60-80세 노인들은 그것을 인정하고 놓을 수 없다.

그리고 시스템이 바뀌었다는 것 또한 인정할 수 없다.

분명히 그들의 방법은 통했었고 그것으로 그들은 찬란했었으니까.

그것을 놓아 버리면 본인들의 가치나 존재 이유가 사라진다는 불안감 때문일 것이다.

정답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들의 업적이 부정당한다.

그래서 변화에 저항하고, 심지어 변화로 더 나아진 민주적 사회를 오히려 ‘위기’로 규정한다.

그들에게 다양성은 혼란이고, 세대 교체는 배신이며, 새로운 규칙은 불필요한 절차일 뿐이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정치세력은 이 감정을 자극한다.

“우리가 지켜온 나라를 이 젊은 것들이 망친다”는 구호,

“훨씬 좋았다”는 향수, “외부의 적이 우리를 위협한다”는 공포.

그렇게 더 세련되지 못하고 지독히도 촌스럽게 손에 있는 것을 놓지 못하고 태극기 옆에 성조기를 같이 흔드는 극우의 행태를 설명한다.


문제는 그 언어를 그들이 배우지 않았다는 데 있다.

아니, 아직도 배우지 않아도 되는 시대라고 그들의 우주안에서 우기고 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하다.

그들의 우주에선 민주주의의 결핍도, 불평등도, 노동자의 희생도, 환경 파괴도 GDP 곡선만 올라가면 모든 것이 용서됐으니.


너무 빠른 변화 앞에서 느끼게 된 그 괴리는 사회적·심리적 전환의 어쩌면 ”자아분열의 고통”이다.

그 고통이 너무 크니 외면 하고 회피하다가 결국은 그 고통을 직면하기보다, 과거의 승리 서사 속으로 후퇴하는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그때는 옳았지만 지금은 옳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인정하는 용기다.

세대의 공을 인정하되,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유연함.

하지만 우리에게 트렌지션에 에너지를 쓸 애정이 남아 있는가.

경제 성장에 모든 것을 갈아 넣느라 같이 “따뜻한 것”을 만들어 놓은 기회가 우리에게도 없었는데,

귀를 막고 현실을 안보려고 눈을 감고있는 그들에게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언젠가 한 물리학자가 얘기한,

“A new scientific truth does not triumph by convincing its opponents and making them see the light, but rather because its opponents eventually die, and a new generation grows up that is familiar with it.”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반대하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그들이 깨닫게 함으로써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자들이 결국 세상을 떠나고 그 진리에 익숙한 새로운 세대가 자라남으로써 승리한다.”가 슬프게도 진리가 아닐까.

토요일 연재